젠장, 이 음악 해도 되는 건가
일시: 2025년 11월 7일 금요일 14시-16시 30분
장소: 한양대학교 제2음악관 정경영 교수 연구실
씨샵레터에서 두 번째로 소개하는 인터뷰입니다. 작년 11월 음악학자 계희승 교수의 인터뷰를 첫 번째로 소개하고 꼬박 일 년만입니다. 지난 8월부로 음악연구소장 임기를 마친 음악학자 정경영 교수와 만나 이야기 나누어 보았어요.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후 고민이 많았어요. 묻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았거든요. 그 많은 질문을 어떻게 정리해야 이 제한된 지면에 담고 싶은 이야기를 충실하게 담을 수 있을지. 음악학자의 시선을 통과한 음악과,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 연구하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사는 이 세계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고 싶었어요. 음악학이 무엇인지, 음악학적 물음들이 왜 중요한지에 관한 이야기들을요.
씨샵레터에서 두 번째로 소개하는 인터뷰입니다. 작년 11월 음악학자 계희승 교수의 인터뷰를 첫 번째로 소개하고 꼬박 일 년만입니다. 지난 8월부로 음악연구소장 임기를 마친 음악학자 정경영 교수와 만나 이야기 나누어 보았어요.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후 고민이 많았어요. 묻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았거든요. 그 많은 질문을 어떻게 정리해야 이 제한된 지면에 담고 싶은 이야기를 충실하게 담을 수 있을지. 음악학자의 시선을 통과한 음악과,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 연구하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사는 이 세계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고 싶었어요. 음악학이 무엇인지, 음악학적 물음들이 왜 중요한지에 관한 이야기들을요.
인터뷰는 2회에 걸쳐 공개될 예정입니다. 올해 1월부터 음악 대학 학장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음악학과 인문학에 관해, 비평에 관해, 음악학적 감동에 관해, 그리고 그가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들에 관한 폭넓고도 깊이 있게 대화 나누어 보았어요.
에디터S 씨샵레터 구독자분들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정경영 안녕하세요. 음악연구소 전(前) 소장 정경영입니다. 씨샵레터가 씨드샵(Seed Shop)일 때부터 관여했던 사람입니다. 구독자가 이렇게 많이 늘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이 사정을 알고 보니 복잡한 거더라’ 하는 것이 드러나는 과정인 거구요. 그런 게 저는 개인적으로 되게 감동적이에요. 게다가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구나’라는 걸 알면 알수록, ‘그래도 이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확실한 문제가 아니었구나’ 하는 것들도 알게 되구요. 이런 것을 알면 알수록 성숙한 이해에 가 닿는다고 생각합니다.

에디터S 근황이 궁금합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정경영 근황에 대해서는 ‘젠장’이라는 말을 빼놓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젠장’ ‘학장’입니다. 라임(rhyme)입니다. 음대 수시 입시 기간이어서, 지난 3주 간 주말이 하루도 없었습니다. 입시가 끝나자, 이번 주 토요일은 대학원 입시 때문에 또 주말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아주 슬픕니다. 공부하고 싶어 죽겠습니다.
리더의 역할, 학장에서 지휘자까지
에디터S 뭘 공부하고 싶은지 듣고 싶지만, 그건 조금 뒤로 미루고요. 학장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 더 듣고 싶어요.
학장은 음대의 리더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요. 마침 여러 조직에서 리더로 계셨잖아요. 음대 학장만이 아니라 연구소장, 창의융합원장, 미래인재교육원장 같은 자리에 계시면서 지도자랄까요, 그런 역할을 많이 해 오셨어요. 이미 살짝 이야기해 주시긴 했지만요, 리더에게 요구되는 자질이 무어라고 생각하세요?

정경영 제 중요한 리더 경력 하나를 빼놓으셨는데 전교 어린이 회장이었습니다. (웃음)
리더에게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가, 저도 궁금합니다. 리더쉽은 타고난 성품에 맞게 발휘하는 게 가장 맞지 않나 싶어요. 제게 모순적인 두 가지 모습이 있는데, 조직 내부에서는 자발적이고 따뜻한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굉장히 애를 씁니다. 끊임없이 인내하려고 해요. 내가 하면 더 빨리, 더 잘할 것 같은데 조직원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려고 노력해요. 당연히 그 판단과 실행에 대한 책임은 제가 지고요. 하지만 외부에서는 태도가 돌변해서 잘 싸웁니다. 싸울 때 되게 잘 싸웁니다. ‘내 천직은 원래 파이터구나’ 이런 생각 들 만큼 갑자기 냉철해지고 논리적으로 되고 그래서 부당한 압력이나 행정편의주의 이런 것도 잘 못 견디는 것 같아요. 외부랑은 잘 싸우고요, 안에서는 자발적인 동기(motivation)가 생기게 돕고 저는 그냥 책임지겠다, 이런 태도를 취하는 거예요. 쉽지는 않습니다.
에디터S 기다리는 일이 마냥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그 기다림이 기대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정경영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학교 행정이 쉽지 않습니다. 직원들의 업무는 언제나 과부하가 걸려 있고요. 안 그래도 바쁜데 학장이 새로 와서 ‘나는 이런 비전이 있으니까 이런 걸 합시다’ 하면 당연히 싫죠. ‘쟤 왜 저래’, ‘금방 그만둘 거면서’ 이렇게 되기 마련이에요. 마지못해서 하는 일이 잘 될 리가 없고요. 꾸준히 좋은 성과를 얻으려면, 조직원들이 일하는 이 음악대학이 얼마나 훌륭한 곳인지, 그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자부심 느낄 만한 일인지를 끊임없이 알려주어야 해요. 그게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고요.
학장이 되고 나서 몇 달 지난 후 PPT를 만들었어요. 직원들을 설득하기 위한 PPT. 내가 왜 이걸 하려고 하는지, 여러분들의 노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나는 어떤 방안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게 하면 어떤 효과가 있고, 그러면 우리에겐 이런 보람이 있고, 학생들에겐 이렇게 도움이 되고… 뭐 그런 발표를 했어요. 그리고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 같아요. 직원들도 좋아합니다. 좋은 성과도 났고요, 그래서 제가 너무 고마워서 다음 주에 직원들에게 한우 고기 사기로 했습니다.

에디터S 음악에서의 ‘리더’를 생각하면 지휘자가 떠올라요. 굉장히 오랫동안 교회 성가대 지휘도 하고 계시잖아요. 리더로서 지휘자의 역할에 관해서도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정경영 지휘자 이야기를 하자면 음악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성가라고 그래도, 음악적인 해석은 다양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음악이 요구하는 해석이 마냥 열려 있지만은 않잖아요. 그것이 허락하는 정도의 해석이 있어요. 그런 해석 안에 들어오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가대원들에게 전달하는 일은 또 다른 일입니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번역하는 게 되게 중요한 일이거든요. 순서를 따지자면, 내 음악이 확실히 있고 그 음악을 실현하기 위해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 번역해서 ‘말’로 전할 수 있거나 아니면 ‘팔’로 전할 수 있거나 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지휘도 어떤 대목에서는 음악학과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음악학도 전문가들끼리 이야기할 땐 다르겠지만,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 전문적인 지식을 이야기할 때는 그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번역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제 이메일 아이디가 ‘헤르메스’(hermes)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인데, 사람들이 제우스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니까 그걸 번역하고 통역하는 것이 바로 헤르메스에요. 헤르메스 신의 이름을 딴 학문이 ‘해석학’(hermeneutics)이고요.
음악, 인간이 만든 ‘무늬’
에디터S 이제 주제를 좀 옮겨 볼게요. 누군가 선생님께 음악학이 무어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하시나요? 그리고 거기에 이어서, 음악학은 왜 필요한가요? 아주 사적으로는 나에게, 또 넓혀서는 음악계에, 예술계에, 그리고 좀 거창하지만 인류에게요.
정경영 간단하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음악학은 음악을 연주하거나 작곡하지 않고, 연구하는 학문이라고요. 저는 그게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 이야기를 하면 설명이 좀 길어지는데요.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만든 어떤 ‘무늬’ 혹은 ‘흔적’에 대한 연구인 거죠. ‘글월 문’의 옛글자에 보면 무늬가 새겨져 있어요. ‘문’은 무늬인거죠. 그러니 천문학이 하늘의 무늬를 연구하는 거라면 인문학은 인간의 무늬를 연구하는 거겠죠. 인간이 만든 무늬나 흔적은 다양하겠죠. 글자일 수도 있고, 문화적인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자연에 새겨진 인간의 모습일 수도 있고요.
인간이 만든 굉장히 중요한 무늬 중 하나를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궁금한 건 인간이 만든 무늬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대체 어떻길래 그런 무늬를 만든 것인가, 하는 점이에요. 음악에 새겨진 무늬를 통해서 인간 전체를, 혹 그게 너무 거창하면, 나도 인간이니까 나라도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사실은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작동하는 것 같아요. 음악을 좋아하는 나를 이해하면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이해하게 되고요, 그러고 나면 인간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는 면이 있으니까요.
어쨌든 음악학은 음악학 나름대로 ‘그게 왜 필요해?’라고 물을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인간을 탐구하는 여러 가지 방식 중 하나로서 이미 의미가 있어요.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에 음악이 굉장히 독특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자꾸 생겨요. 무슨 말인가 하면요, 인간을 이해하는 것을 아예 목적으로 하는 철학을 보면, 철학자들이 음악을 이해하고 있다면 자신들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훨씬 더 쉽게, 빨리, 효율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 왔어요. 그 생각을 음악학자 수전 매클러리(Susan McClary)가 어떤 책 서문에 썼더라구요. ‘그동안 음악학은 인문학에 한 30년씩 뒤처져 왔지만, 이제 인문학을 선도할 때가 된 것 같다.’ 이런 식으로요. 그걸 보고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구나’ 했어요. 그러고 있는데 전남대에 계신 최유준 선생님을 만나면 맨날 『음악학이 인문학에게』 이런 책 써 보자고 하시거든요. 그러니 때가 무르익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에디터S ‘철학자들이 음악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 떠오르는 사례 같은 거 있으신가요?
정경영 지금은 너무나 유명한 얘기인데요,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이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얘기했잖아요. 이게 무슨 말인지 빨리 말하자면 이런 거 아니겠어요? 미디어는 콘텐츠를 전달하는 매체죠. 매체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때는 ‘콘텐츠가 무엇이냐’하는 ‘WHAT’에 관심을 가졌고, 그것이 ‘어떻게 전달되나’ 하는 ‘HOW’는 부차적인 문제였어요. 그런데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다’라는 매클루언의 주장은 ‘WHAT에 집중에서 놓치고 있던 HOW가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HOW 때문에 WHAT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 이런 얘기라는 거죠. 매클루언은 이런 말을 20세기에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음악에서는 19세기에 이미 한슬릭(Eduard Hanslick)이 이미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음악은 내용은 소리로 울리는 형식이다’ 이게 한슬릭의 말이거든요. 무슨 말인가 하면요, 음악한테는 “그래서 네가 말하려는 게 뭐야?” “한마디로 요약해 봐” 이런 게 가능하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아무리 공연 프로그램 노트 쓸 게 많아도 음악을 빨리 듣거나 띄엄띄엄 듣거나 이렇게 할 수 없어요. 다 들어야만 한단 말이에요, 실시간으로. 그러는 이유는 무어냐 하면, 거기에 ‘콘텐츠’가 있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WHAT’이 있는 게 아니라, ‘HOW’밖에 없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니까 매클루언이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하는 거, 음악은 옛날 고릿적부터 ‘WHAT’이 아니라 ‘HOW’가 문제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100년 있다가 뒷북 치는 거죠. 음악은 진작 알고 있었어요. 음악이 사고를 얼마나 빨리 뛰어넘을 수 있는 첩경을 만들어 주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자크 아딸리(Jacques Attali) 같은 사람이 “음악은 예언자다”라고 하는 말의 뜻이 그런 데서 딱 느껴지는 거죠.
젠장, 이 음악 해도 되는 건가
에디터S 굉장히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바로크 음악 전문가이기도 하면서 소리 연구도 하고 계시고요, 음악사 쓰기에 대한 관심, 그리고 최근에는 공공 음악학이라는 것으로도 넓히고 계시죠.
음악이 좋으니까 이렇게 음악을 하고 계시는 거라 짐작은 하지만, 여러 음악 활동 중에서도 다름 아닌 ‘연구’를 하게 된 계기라든가, 아니면 선생님께 중요했던 첫 번째 음악학적 질문이라든가, 이런 것들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정경영 음악을 연구하게 된 건 집안 환경, 혹은 유전 이런 것 같아요. 뭐든지 호기심이 생기면 ‘연구’해야 한다, 이런 거요.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을 무지하게 좋아했어요. 좋아하는 것 못지않게 음악에 대해 알아가고 이야기하는 게 그렇게 재밌더라구요. 고등학교 때 음악사를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여차저차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는 과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얼마나 기뻤겠어요.
그렇게 대학에 들어갔는데요. 제가 87학번이니까 1987년이죠. 그 시절이 하 수상했던 거예요. 대학생이 끌려가서 고문 받다가 사망하는 박종철 사건도 있었고요. 그러니까 모든 대학생이 데모하고 그럴 때였어요. 제가 생각했던 대학의 낭만이라는 건 전혀 없었고요. 음대 중에서도 제 전공인 음악이론은 음악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까, 말하자면 음대에서는 브레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까, 역사의식이라고 할까요, 이런 것들에 남달리 좀 치열했던 것 같아요.

그때 누나들, 형들 보면서 부채 의식을 느꼈어요. ‘이런 상황에 내가 음악해도 되나.’ ‘음악을 한다는 건 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 있는 게 아니라 사치 같은 게 아닌가.’ 이런 부채 의식, 그렇게 죄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너무 강하게 온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젠장, 이 음악 해도 되는 건가.’ 게다가 진짜 음악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걸 ‘연구’하고 있으니까 너무 배불러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 배부른 일을 내가 정당화하지 않으면 계속하지 못 하겠다는 위기의식이 생겼어요. 음악이 진짜 좋은 것인지, 정말, 정말 냉정하게 한번 보자. 음악이 인간에게 필요한 건지. 이런 게 저에겐 동력이었던 거예요. 대학교 1학년 때죠.
그러다 어느 순간 알게 된 거예요. ‘음악이 인류에게 필요한가’라는 질문은 굉장히 중차대한 질문을 생략하고 있다는 건데, 그건 뭐냐하면 ‘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더라구요. 근데 ‘음악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되게 크잖아요. 어떻게 대답하겠어요. 그러면 ‘최소한 내가 음악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고민해 보자’ 이렇게 된 거예요.
그렇게 하고 보니까 제가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150년 전 이 땅에 살았던 내 조상의 음악하고는 다른 거더라구요. 오히려 300년 전 유럽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음악과 내 생각이 연결된다는 걸 알게 됐구요. 그렇다면 ‘이거 무슨 일이 있는 거구나’ 이렇게 된 거죠. 크게 얘기하자면, 우리나라에 생긴 서구적 근대화 문제라는 점을 생각하게 됐고, 근대화, 근대성이 무엇인가 살피다 보니 서구에서도 처음부터 근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고요. 이런 노정을 따라간 거죠.
아이러니하게도 서구의 과거 생각이 나의 생각의 뿌리이다 보니까 서구에서의 음악이라는 게 도대체 뭔가 하고 따라가 봤어요. 그랬더니 음악에 근대성이 드러나는 여러 뚜렷한 징후들이 있더라구요. 예를 들면 악보가 생겨난다거나 기보법이 발전한다든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제게 제일 흥미로웠던 것은 가사가 없는 음악, 그러니까 무언가의 도움을 받지 않는 음악, 음악 그 자체가 힘을 발휘하는 시기의 음악이었어요. 언제 그런 사고가 생겼나 하고 봤더니 그게 17세기 바로크 시대였던 거구요, 그래서 박사 학위 논문이 그거죠.
넓게 얘기해도, 좁게 얘기해도 ‘비평’
에디터S 이따가 이야기할 공공 음악학이란 주제와 어느 정도 연결되는 것 같은데요. 이번에는 학계와 음악 공연계에 관한 질문드리고 싶어요. 같은 음악 분야이지만 음악학과 음악 공연예술 분야는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거든요. 몇몇 음악학자들은 공연예술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기도 하지만, 소수인 것 같구요.
음악학이 음악 공연예술 분야와 연결될 때, 음악학자가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정경영 음악학자가 음악 공연 현장에 관여해야 하는 일은 넓게 얘기해도, 좁게 얘기해도 비평이죠. 비평은 서술적 발화(descriptive utterance)가 아니라 가치 판단적 발화(evaluated utterance)에요. 좁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음악회 같은 구체적인 음악적 사건에 대한 가치 평가적 발언이 중요하다는 것이구요, 넓게 얘기한다는 건 이런 거예요. 음악회 같은 구체적인 음악적 사건에 대한 비평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음악계에 대한 가치 판단, 우리나라의 음악이 무엇이냐, AI의 음악도 음악이냐, K-Pop이라고 했을 때 K가 정말 음악적 특징이냐, 뭐 이런 질문까지 다 포함해서 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에디터S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Richard Taruskin)의 『The Danger of Music』의 서문에 보면, 타루스킨이 스스로 학계가 아닌 대중을 위한 지면에서 비평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는 대목이 나와요. 학계에서는 학계의 관점으로 타루스킨의 행보를 마뜩잖아 하고요, 대중 사이에서는 또 대중들 나름의 입장이 있고요.
정경영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조금 전 제가 비평에 관해 했던 말, 음악학자들이 동의할지 잘 모르겠어요. 음악학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너무 다른 입장들이 많아요. 예를 들면 어떤 분들은, 우리나라에서 음악학은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건 너무 명확하죠. 우리나라에 베토벤 학자 있나? 없습니다. 헨델 학자 있나요? 뭐 있지만, 활동 안 합니다. 저도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몬테베르디 학자는 아니고요. 이렇게 뭐 한 명 두 명 있을까 말까 한 우리나라에서 음악학을 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러면 음악학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냐, 외국의 음악학을 잘 소개하는 게 우리나라 음악학계의 임무다, 이런 입장인 거죠. 너무너무 강력한 입장입니다.
이런 입장이 아니더라도, 음악학자가 해야 하는 것은 전문적인 연구지, 그런 연구를 ‘적용’해서(전 그것을 적용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요.) 무언가 하는 것은 번외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입장도 굉장히 많을 것 같아요. 그러니 ‘넓은 의미든 좁은 의미든 비평을 해야 한다’ 이런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음악학자분들도 많지 않을까 싶어요.
또 하나, 청중과 만나는 부분에 관해서 말해 보자면요. 우리나라에서는 되게 묘하게, 음악학계가 넓지도 않은데 음악 애호가 출신들의, 말하자면 도슨트 역할을 하는 분들이 많이 생겼단 말이에요. 음악 평론가라고 하는 그분들과 음악학자의 일이 겹치는 거죠. 음악학자가 청중과 만나려고 한다면요, 그분들과 차별화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하구요, 그것 못지않게 뛰어난 소통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장담 못하겠고, 전자의 경우도 몇몇 음악학자를 빼놓으면 잘 안되는 것 같고… 그러다 보면 음악학자는 자칫 잘못하면 그냥 잘난 척하는 사람들과 달라 보이지 않기 쉽죠.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음악학, 설득의 인문학

에디터S 소통에 관해 말씀해 주셨는데요. 소통이란 키워드가 선생님께 중요하다고 보입니다. 앞서 리더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실 때도 그랬고요. 굉장히 오랫동안 음악회 해설가로서, 또 대중 강연자로서도 활동하시고요. 이때 소통이라는 게 단순히 어떤 정보나 지식을 알아듣기 쉽게 전달하는 것에 멈추는 것 같지 않아요.
정경영 이 대답도 음악학계 내에서 동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근본적으로는, 인문학적인 어떤 지식은 궁극적으로 설득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증명이 아니라. 이걸 순진하다(naive)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걸 증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나이브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음악학적 문제가 증명될 수 있는 거라고 여기는 것이니까요.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에요.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요.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 아니면 해석학적 아치(arch), 아니면 현상학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음악학이 ‘증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여전히 아들러(Guido Adler) 시대에 살고 있는 거죠.
그렇지만 아들러 시대의 실증주의적인 학문적 목표가 설득이라는 가치로 ‘바뀐’ 것이라기보다는 ‘성숙’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음악학을 설득의 문제라고 한다고 해서, 어떤 명료한 대답을 내놓지 않고 자신의 주장에 대해 ‘책임지지 않겠다’거나 ‘사실(fact)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나아지는 대답들이 있다’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음악학자는 궁극의 대답(final answer)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성숙한 대답, 혹은 어떤 문제의 ‘가치’에 관해 계속 이야기할 수밖에 없죠.
그렇다면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데요. 음악학은 학문이니까 기본적으로는 증명의 방식을 따라가죠.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것들이 어떤 질적인 도약을 일으키는 부분이 생기게 돼요. 그런 걸 전 감동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예술적 진리는 악보를 분석해서 느껴지는 게 아니에요. 음악이 내 마음에 탁 치고 들어오는 감동의 순간, 그것이 결국 그 음악에 설득되는 순간인 거거든요. 음악과 내 마음에 공명이 생긴 건데요, 이럴 때 일종의 예술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중을 향한 소통의 순간이라면 더 그렇죠. 음악회 해설을 할 때는, 프로그램 노트를 쓸 때든, 무엇을 하든 그런 부분이 제게 고민입니다. 논리와 팩트를 넘어서, 나에게 느껴지는 것, 내가 느끼는 그 감동과 가치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하는 부분이요.

에디터S 그게 되게 어려운 일이잖아요. 치밀한 논리적 과정 끝에 어떤 질적인 도약이 생겨나고 그 과정 자체에서 전해지는 감동이란 것이 있다…라는 거요.
정경영 이게 논리의 도약, 혹은 논리의 비약과 혼동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게 어렵습니다. 그냥 갑자기 내 논리를 흐지부지하게 만들거나, 그래서 갑자기 다 같이 울어버린다든가, 그러면 그냥 웃긴 게 되는 거거든요.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말하자면 루카치(György Lukács)라는 문학 이론가가 그런 이야기 하거든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이론적으로 만든 사람인데요. 이 사람은, 말하자면, 소설은 세계의 보편적인 모습을 그려야 한다고 말해요. 그런데 보편적인 세계는 추상적이다 보니 와닿지 않겠죠. 남 일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하지만 반대로 아주 개별적인 이야기를 하면 보편적인 지혜를 얻지 못하게 돼요. 그래서 그 사이에 변증법적인 사고가 개입되는 거예요. 굉장히 개별적이지만, 그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인 어떤 가능성을 확 열어젖히는 상황이 만들어지죠. 루카치는 그걸 ‘총체성’이라고 말해요.
보편적인 이야기는 내게 와닿지 않아서 허탈한 이야기가 될 수 있어요. 그렇지만 개별적인 이야기가 개별적인 것에서 시작했음에도, 그것의 특수성과 개별성을 잃지 않는 한에서 보편적인 이야기에 가 닿는다면, 뭔가 개안한 것 같은, 그런 경험이 될 수 있거든요. ‘아, 그렇구나. 이 음악을 통해서 나는 드디어 음악이 이야기하는 바의 그 끝자락을 좀 잡은 것 같아.’ 이런 느낌 같은 거예요.
그리고 음악이 시간적인 경험이다 보니까, 결국 우리가 시간을 살아내는 것, 그러니까 우리의 삶과 자꾸 유비가 생긴단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음악회 해설을 하다 보면, 그 음악이 지시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 같은 것들이… 뭐라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하여튼 그런 것들이 청중과 공유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될 때 그걸 탁 치면, 그때는 청중과 되게 짜릿하게 공명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얘기인 거죠.
에디터S 그런 것이 연구하는 일에도 연결될 수 있을까요?
정경영 그게 한 끗 차인데요. ‘감동’이라는 말을 쓸 때는 음악학적 배경지식이 많지 않은 청중을 염두에 두는 것이고요, 그것이 학문적인 작업에서는 감동의 전제가 되는 ‘성숙한 이해’가 필요한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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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T II] 음악학자 정경영 인터뷰 – 젠장, 이 음악 해도 되는 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