꺄항! ‘귀여움’이라는 현대 미학 현상 #1

작곡가, 큐레이터

카와이한 고양이 한 마리가 현대 미학을 선명하게 비춘다.

미쿠가 나를 바라보며 가르랑거린다. 내가 글을 쓸 때 키보드 위에 올라앉는 그런 고양이가 아니다. 대신 책상 위에 얌전히 서서 특유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반짝인다. 나는 유기동물 보호소가 아니라 극장 창고의 먼지 더미 속에서 미쿠를 구해 왔다. 그 전까지 미쿠는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의 소품으로 무대에 오르던 존재였다. 미쿠는 이른바 ‘귀여운 오브제’(cute object)로서, 나의 오페라 《인형의 집》(Dollhouse)의 여러 회차 동안 객석 한가운데에서 야옹야옹 울어대는 역할을 맡았다. 관객들은 깜짝 놀라 미쿠를 돌아보며 미소를 짓거나 웃음을 터뜨렸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속삭였다. 사람들은 미쿠를 좋아했다. 미쿠가 진짜 고양이가 아니라, 귀 모양이 살짝 돋아난 달걀형 플라스틱 껍데기에 ● ᆺ ● 모양 얼굴이 그려져 있고, 내장 스피커가 달린 인형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나는 미쿠를 출발점 삼아, 다소 급진적일 만큼 무해한 ‘꺄항!(Aww!)’이라는 감탄사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새로운 음악(Neue Musik)이 대중의 취향에 영합해 그 꿈과 유토피아를 포기했다고 주장하는 비평적 권위자들을 반박하기 위해서다. 나는 미쿠의 귀여움이 실은 전복적인 저항의 형태임을 보여주고 싶다. 요란한 도발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을 뿐이다.

2년 전, 한 음악 철학자와 ‘귀여움’에 대해 대화 나눈 적이 있다. 그에게 귀여운 오페라를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회의적이었다. “귀여움은 소비 미학이에요. 대중문화를 고급문화에 통합해 국립 오페라 극장에 귀여움을 들여오는 건 포스트모더니즘적 시도죠. 근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끝났어요. 더 이상 도발의 잠재력이 없으니까요. 당신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함정에 빠지는 게 아닌가 걱정되네요. 제프 쿤스의 키치 같은 건 80년대나 90년대에나 통했던 방식이에요…” 나는 이 말을 오래 곱씹었다. 어쩌면 포스트모더니즘의 함정에 빠진 건, 여전히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이분법적 가치 판단과 도발의 도식에 갇혀 있는 그가 아닐까? 최근 한 인터뷰에서 비디오 아티스트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은 뻔뻔함, 충격, 아이러니를 주무기로 삼는 우익 정체성 정치 계정들을 언급했다. 그는 이러한 수단들이 “미학적으로 파산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도발이라는 방법론은 현재 반동주의와 매우 강력하게 결합해 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도발적인 행동은 오히려 도발을 자제하는 것입니다.”1Steyerl, Hito: “Suddenly I am a military specialist”, in: ZEIT 22/2025. https://www.zeit.de/2025/22/hito-steyerl-filme-kunst-provokation/komplettansicht (June 28, 2025).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귀여움(Cuteness)’을 하나의 동시대적 미학으로 규정하려 한다. 사회적 분열과 시끄러운 권력 과시가 만연한 시대에, 귀여움은 역설적으로 그 반대의 위험을 감수한다. 귀여움은 친밀함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요구하며, 취약함을 드러내어 기꺼이 공감의 장을 열어젖힌다. 또한 경직된 이분법을 유연하게 넘나들고 양가성을 용인하며 보살핌의 관계를 통해 안락함을 조성한다. 이것이야말로 유토피아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이 유토피아는 동시대 사운드와 현대 음악의 연주 프로그램에 이미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크리스티안 빈터 크리스텐센(Christian Winther Christensen), 미켈 우르키자(Mikel Urquiza), 셀레스트 오람(Celeste Oram), 크리스틴 쇠예르센(Kristine Tjøgersen), 니나 후쿠오카(Nina Fukuoka), 마르타 시니아디(Marta Śniady), 알렉스 팩스턴(Alex Paxton), 한나 켄달(Hannah Kendall), 리사 슈트라이히(Lisa Streich), 유리 우메모토(Yuri Umemoto) 등 수많은 작곡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음악에 귀여움을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음악을 둘러싼 담론에서 ‘귀여움’과 그 전복적이며 유토피아적인 잠재력은 여전히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상태다. 고양이 미쿠의 명석함이 이 상황을 바꾸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미쿠는 문학 연구2Ngai, Sianne: “The Cuteness of the Avant-garde” [2005], in: Ngai, Sianne: “The Cute and the Gimmick”, Leipzig 2022., 동시대 미학3Baßler, Moritz / Drügh, Heinz: “Contemporary Aesthetics”, Konstanz 2021., 시각 예술4Kohout, Annekathrin (ed.): “Cuteness. The cute as an aesthetic category”, KUNSTFORUM Volume 289, Cologne 2023., 문화 연구5Blome, Eva et al. (eds.): »Süüüüß!«, Journal for Cultural Studies 01/2022, Bielefeld 2022., 귀여움 연구(cute studies)6Dale, Joshua Paul et al. (Ed.): “The Aesthetics and Affects of Cuteness”, New York 2017.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지적 자양분을 받아 성장했다.7한글로 읽을 수 있는 글로 다음 두 가지를 소개한다.

(1) 에이미 아일랜드 & 마야 B. 크로닉, 『큐트 가속주의』(Cute Accelerationism). 윤태균 옮김. (폼레스 트윈즈, 2025).
(2) 호규현, 정신영, 장민지, 전혜정, 양승욱, 조예진, 『귀여워!』. 물결 시리즈 1, (서울: 잉공-위성82, 2025).

안네카트린 코후트(Annekathrin Kohout)가 지적한 것처럼, 독일어권에서 영어 ‘큐트’(cute)를 그대로 개념어로 사용하는 이유는 독일어에서 귀엽다는 뜻으로 쓰이는 ‘süß’(달콤한, 귀여운)나 ‘niedlich’(앙증맞은)가 지닌 함의를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우회하기 위해서다. “‘cute’라는 개념어는 단순히 무해하고 피상적이거나 유치한 무언가를 지칭하려는 것이 아니다. ‘cute’는 그것을 넘어선다. ‘cute’는 순진무구함을 넘어서는 태도를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다.”8Kohout, Annekathrin, in: Dupelius, Friedemann / Thomas, Clemens: “Finally cute! New music that sounds ‘cute’”, radio broadcast on WDR 3 from 29.10.2023. 다르게 말하면, 젊은 문화로서의 ‘귀여움'(cute)은 ‘멋짐'(cool)을 대체하는 새로운 키워드라고 할 만하다. 90년대에 거의 모든 멋진 것에 ‘쿨하다’는 수식어가 붙었듯이, 오늘날 일반적인 언어 사용에서 ‘귀여움’ 역시 그만큼 광범위하게 쓰인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귀여움’은 ‘멋짐’과 달리 거리감보다는 친밀함을 강조하고, 경쟁적이고 배타적이기보다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하고 포용하는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멋짐’의 뿌리는 거친 거리 위 남성들의 주도권 싸움에 닿아 있다.9Harris, Daniel: “Cute, Quaint, Hungry and Romantic. The Aesthetics of Consumerism”, New York 2000, p. 52f. 반면 ‘귀여움’은 주로 아이 같거나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되짚어보는 한편, 여전히 이 도식이 그대로 통하는지를 비판적으로 되물어야 한다. 더군다나 젠더 배치(gender dispositifs), 젠더적 함의나 이분법적으로 축소된 서사 패턴들이 사회적으로 치열하게 논박되고 재편되는 오늘날에는 더욱 그렇다.

“일단 팝을 ‘이해’(got)하고 나면, 어떤 기호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없게 된다.” 모리츠 바슬러(Moritz Baßler)와 하인츠 드뤼그(Heinz Drügh)는 앤디 워홀의 이 유명한 말을 인용한다. 현대 미학을 이해하기 위해 ‘getten’이라는 영어 표현을 사용하면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미, 관계, 참조점을 파악하고 ‘알아채는(getting)’ 것이다. 이는 ‘귀여운 소리’가 지닌 유토피아적 성격과 미쿠의 플라스틱 껍데기 아래 숨겨진 전복적 저항을 알아채는 일이다. 나아가 ‘귀여움’이라는 동시대 미학적 화두를 본격적으로 논의함으로써 미래의 ‘스타일 공동체’(style community)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는 미학적 판단이 지닌 복잡한 맥락을 온전히 이해하고, 창작자가 의도한 스타일을 직관적으로 알아채는(getten) 이들, 서로를 향해 ‘응, 무슨 말인지 알아’하고 응답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끼익끼익 우는 아기 악어

한 실험에서는 검은 카이만 악어가 새끼의 울음소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조사했다. 포식자의 공격을 받은 새끼 카이만 악어의 비명 소리를 스피커로 재생하자 성체 악어는 본능적으로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가 보호하려는 방어자세를 취한 반면, 새끼 악어는 스피커에서와 같은 비명을 질렀다. 이와 달리 스피커를 통해 평온한 상태의 새끼 울음소리를 내보냈을 때, 성체 악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새끼 악어는 놀이 행동을 보이며 스피커 주변으로 다가갔다. 새끼 카이만 악어는 이렇듯 울음소리를 달리해 상대에게 다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 “새와 마찬가지로, 새끼 악어류 역시 포식자 방어 전략이나 무리의 결속, 어미와 새끼 간 위치 확인, 그리고 부모의 보살핌을 유도하는 다양한 울음소리를 사용한다.”10Vergne, Amélie at al.: “Acoustic signals of baby black caimans”, in: Zoology 114, Amsterdam 2011.

새끼 카이만악어는 돌봄, 보호, 또는 놀이와 사교성 같은 특정 행동을 유발하는 소리를 낼 수 있다. 이는 1943년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가 정립한 그 유명한 ‘아기 도식(Kindchenschema)’의 메커니즘과 정확히 같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로렌츠는 ‘아기 도식’이 큰 눈과 깊은 눈망울, 몸에 비해 커다란 머리, 짧고 둥글둥글한 팔 다리, 서툰 움직임 같은 시각적 특징들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아기 같은 외형을 지닌 존재를 귀엽다고 느끼며, 우리가 귀여운 것에 끌리는 이유는 대상을 먹이고 돌보고 싶어 하는 본능적 충동에서 비롯된다. 오늘날에도 로렌츠의 ‘아기 도식’은 문화적 배경에 따라 나타나는 주관적이고 긍정적인 감정 반응까지 아우르는 넓은 의미로 확장되어, 귀여움을 정의하는 모든 이론의 기본 틀로 소환된다. 조슈아 데일(Joshua Dale)은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우리가 귀여운 것을 보고 반응하는 것이 태어날 때부터 장착된 본능이든 자라면서 배운 문화적 학습의 결과이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귀여움이 작동하는 방식에 있다. 귀여움이란 동물이나 인간의 형상을 한 어떤 존재가 우리에게 다가와 ‘나를 돌봐달라’고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던지는 호소다. 우리가 특정 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바로 그 신호가 우리에게 가닿아 통했기 때문이다”.11Dale 2017, p. 4.

실험에 참여한 검은 카이만 악어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새끼 악어의 울음소리만 들었을 뿐이다. 새끼 악어를 눈으로 본 것이 아닌데도 이들에게서는 명확한 행동 반응이 관찰되었다. 그렇다면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에도 ‘아기 도식’이 존재하는 것일까? 또 다른 실험이 이 가설을 증명했다. 인지과학 연구에 따르면, 청각 자극과 시각 자극은 동일한 뇌 활동을 유발한다. 귀로 듣는 감각 역시 우리의 돌봄 본능을 깨우고, 공감 능력과 사회적 행동, 놀이 행동을 이끌어낸다는 것이다.12다음 글 참조. Kringelbach, Morten et al.: “On Cuteness: Unlocking the Parental Brain and Beyond”, in: “Trends in Cognitive Sciences”, Amsterdam 2016.

시각적이든 청각적이든, ‘아기 도식’은 하나의 상징적인 메타 형식(Metaform)으로 존재한다. ‘귀여움’을 인식하는 과정은 일종의 코드를 읽어내는 일과 같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와 특징을 하나의 신호로 인식하며, 이를 통해 생산자와 해석자는 각 요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따라서 문화적 결과물 안에서는 이 아기 도식이 아무리 추상적이거나 축소된 형태로 나타나더라도, 여전히 돌봄과 놀이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13다음 글 참조. Dydynski, Jason Mario: “Modeling Cuteness: Moving towards a Biosemotic Model for Understanding the Perception of Cuteness and Kindchenschema”, Berlin 2020. 동글동글한 눈망울이 보이지 않아도 새끼 악어는 보살핌 받을 수 있다. 그 녀석이 내는 귀여운 끽끽 소리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제 이 울음소리를 따라가 보며, 그 소리가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가 지켜볼 차례다.

나를 부드럽게 만드는 음악

‘아기 도식’을 청각적 차원으로 확장했으니 이제 듣는 행위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춰보자. 귀여운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음악을 어떻게 지각할까? 달리 말하자면, 애초에 어떤 소리를 귀엽다고 느끼려면 우리의 지각 방식은 어떤 상태여야 할까? ‘귀엽다’는 표현이 분명 미학적 판단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분석이나 평가보다는 경청이다. 대상을 향해 마음이 활짝 열리는 다정한 듣기. 나는 이것을 ‘귀여운 듣기’(niedliches Hören)라 부르고 싶다.

예를 들어 셀레스트 오람(Celeste Oram)과 앙상블 어댑터(Ensemble Adapter)가 제작한 입체음향극 《새로운 섬들의 팟캐스트 네트워크》(Yunge Eylands Varpcast Netwerkið)는 아이슬란드 신화 속 요정들을 다룬다. 이 신화적 존재들을 조명하는 한 장면에서는 오직 음악만으로 이야기를 건넨다. 부드럽고 서정적이며 마법 같은 음악이다.

나의 듣기 태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음악에 매료되고, 어린아이처럼 황홀해진다. 동화 속 존재들이 아직 힘을 가졌던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이다.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요정의 마법 가루가 무대 위로 흩날리는 소리를 듣는다. 마침내 그 존재를 믿게 된다. 이 음악은 참으로 부드럽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음악은 나 또한 부드럽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나는 장면을 연상하면서, 상황에 공감하면서 마음을 기울여 듣는다. 음악에 몰입한다. 음악이 울려 퍼지는 공명판으로 나의 몸과 마음을 내어준다. 음악은 내 안에서 무언가를 일깨운다. 나를 자극한다. 이러한 듣기는 대상을 굳이 이해하고 분류하고 평가하려는 분석적 듣기와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그저 멍하니 소리를 흘려보내는 수동적인 감상과도 다르다. 나는 단순히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참한다. 음악과 함께 기꺼이 놀이한다(play).

안네카트린 코하우트는 이러한 수용적 태도를 “귀여운 시선”이라고 정의한다.14다음 글 참조. Kohout, KUNSTFORUM 2023, p. 63f. 이는 감사, 겸손, 사랑, 관용, 화해의 마음이 가득 찬 태도다. 타자의 다름을 단순히 용인하는 수준을 넘어, 대상에게 깊이 공감하며 사랑으로 끌어안는 다정한 시선이기도 하다. 음악 영역에서는 호르스트 룸프(Horst Rumpf)가 제안한 “듣는 듣기(hörendes Hören)” 개념이 이와 유사하다. 과거의 기억을 통해 소리를 알아채거나(재인식) 특정 틀에 맞추어 분류하려 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들려오는 소리의 ‘지금, 여기’와 마주하는 몰입이다. 룸프는 이를 “감정적으로 물드는(pathisch getönt) 듣기”라 부른다. 섣부른 이해와 설명을 거부하는 듣기 문화다.15Rumpf, Horst: “The other attention”, in: Grimmer, Frauke et al. (eds.): “Artists as educators”, Mainz 2008, p. 14..

‘귀여움’은 귀 기울여 소리를 듣는 순간 찾아온다. 듣는 이가 귀여운 태도로 음악을 들을 때 그 소리도 귀엽게 들린다. 어떤 대상을 ‘귀엽다’고 판단하는 행위는 머리로 계산하는 인지적 평가라기보다 정서적 반응에 가깝고 이는 자신을 열어두는 데서 생겨난다. 청중, 연주자, 작곡가 모두 마찬가지다. ‘귀여운 듣기’를 공유하는 이 (스타일) 공동체는 이 지점에서 정치적 차원도 인식한다. 크고 거친 목소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타인과의 거리두기가 만연한 시대, 이 듣기 방식은 대단히 전복적인 힘을 발휘한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

이제 시선을 작은 존재들, 아이들에게 돌려보자. 오늘날 ‘귀여움’이 우리 일상 어디에나 가득하다. 이런 상황은 19세기 중반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아동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과 관계 있다. 이 시기 인류는 비로소 어린이를 보호해야 할 존재로 인정했고 아동 노동과 성폭력을 법으로 금지하는 중대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다 1970~80년대에 이르러서는 아동기와 성인기 사이의 경계가 서서히 허물어졌다. 아이들은 소비 생활을 비롯한 여러 영역에서 점차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행동했으며, 성인 역시 스스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내면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점차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귀여움’은 종종 유치하거나 철없는 것으로 폄하되곤 한다. 하지만 미학적 관점에서 볼 때 귀여움은 “어린아이 같은 성숙함, 아무것도 모르는 무구한 얼굴과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영악한 얼굴, 무성(無性)과 유성(有性) 사이의 본질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 놀랍도록 시대정신을 예민하게 포착해 낸다.”16May, Simon: “The Power of Cute”, Princeton 2019, p. 143.

크리스티안 빈터 크리스텐센(Christian Winter Christensen)은 자신의 작품 《어린이들의 노래》(Children’s songs, 2022)에서 이 같은 시대정신을 포착한다. 이 작품에서 어린 시절은 하나의 거대한 놀이터가 된다. 그는 어린 시절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가간다. 실제로 두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익숙한 코드들을 변형하고 섬세한 소리들을 엮어내며 유쾌한 놀이를 벌인다. 도나우에싱겐에서 열린 초연 당시 이 소리들은 너무 가냘파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반면 녹음본은 마이크를 지나치게 가까이 댄 탓에 오히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우렁차고 부자연스럽게 들린다.) 귀를 기울이면 음계와 화음 진행, 옥타브가 연이어 흘러나온다. 소리의 파편들이 반복되고 루프 처리되며 기계적인 움직임에 휩싸인다. 들릴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강약 조절, 얼핏 스쳐 지나가는 동요의 흔적, 그리고 정교한 앙상블까지. 크리스텐센은 추억, 향수, 그리고 지나간 시간의 파편들을 자유자재로 주무르며 놀이한다. 그러면서도 결코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급작스러운 전개와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구간을 배치하는가 하면, 하몬 뮤트(Harmon Mute)를 끼운 금관악기로 도날드 덕처럼 꽥꽥거리는 만화 같은 소리를 연출해 분위기를 단숨에 환기하기도 한다.

곡의 중간쯤 이르면 커다란 레고 블록 장난감 기차 위에 얹힌 스크린 하나가 피아니스트 앞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온다. 기차를 움직이는 전기 모터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기차 위 스크린에는, 노래하고 있지만 소리 나지 않는 소녀의 모습이 비치더니 이내 스크린 기차가 ‘부르르릉’ 소리를 내며 다시 뒤로 물러나고 연주는 계속된다. 마지막에는 두 명의 타악기 연주자가 레고 블록을 하나씩 쌓아 올리며 집을 짓는다. 이쯤 되면 연주자들은 더 이상 엄숙한 음악가가 아니다. 그들은 천진난만한 놀이꾼, 어쩌면 완전히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초연 후 크리스텐센에게 《어린이들의 노래》가 귀여운 작품인지 물었다. “아니요, 이 곡은 어린 시절에 관한 거예요.” 그는 답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는 귀염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한 마디를 보탰다. “이렇게 복잡하고 감당하기 힘든 세상… 참 슬퍼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이 세상에 사랑을 건네고 싶었어요. 아이들이 가진 사랑을요.”

크리스텐센은 기억과 감정, 장난감 소리들을 가지고 놀이를 펼치며 엄숙한 어른들의 세계에 부드럽고 섬세한 대조를 그려낸다. 우리는 아주 독특한 세계로 푹 빠져든다. 놀이의 세계다.

놀이의 미학으로서의 큐트니스

이 글에서는 스스로 선택하고 주도하는 ‘귀여움’을 하나의 놀이 형태로 바라보려 한다. 이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일까, 아니면 그저 꾸며낸 겉치레일 뿐일까. 진심일까, 아닐까? 정말 저렇게 순진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그런 척하는 것일까? 귀여움은 때로 사람을 헷갈리고 불안하게 만든다.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의도적으로 쓰고 벗을 수 있는 사회적 가면이어서다. 귀여움이 가진 힘은 바로 이 양가성에 있다. 진지함과 놀이, 진짜 모습과 연출된 무대 사이의 그 어느 쪽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모호함이야말로 귀여움이 지닌 진짜 힘이다.

미켈 우르키자(Mikel Urquiza)의 《뻐꾸기》(Kuckuck)를 디딤돌 삼아 놀이 미학으로서의 귀여움을 조금 더 깊이 파고들어 보자. 여기서 주목할 만한 틀은 로제 카유아(Roger Caillois)가 제시한 ‘미미크리(Mimicry)’, 즉 역할 놀이라는 개념이다.17Caillois, Roger: “The Games and the People. Mask and Intoxication”, Berlin 2017. Page references in the following text are given within the main text. 카유아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자신을 감추고, 변장하고, 가면을 쓰고, 역할을 연기하려는 성향”18Caillois 2017, p. 43.이 존재한다. 이는 연극, 인형극, 그리고 아이들이 끊임없이 펼치는 상상 놀이와 깊이 맞닿아 있다. 그 이면의 동기는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거나, 다른 사람으로 인식되기를 바라는 욕구다. 속이려고가 아니라, 즐겁게 정체성을 탐구하는 놀이 행위다. 숨기기, 변신하기, 깜짝 놀라게 하기는 가면의 세 가지 기능이다. 엘리자베트 하이네(Elisabeth Heyne)의 말처럼, 미미크리이라는 놀이 형식은, 말하자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독특한 방식”인 셈이다.19Heyne, Elisabeth: Sciences of the Imaginary, Berlin 2020, p. 182. 다시 카유아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미미크리 끊임없는 창조다. 놀이의 규칙은 하나뿐이다. 행위자는 관객을 매료시켜야 하고, 어떤 실수로도 관객의 환상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반대로 관객은 무대 장치나 가면, 꾸며진 세계를 거부하는 대신 기꺼이 그 환상 속으로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초대장을 받은 이상, 정해진 시간 동안만큼은 그 세계를 현실 너머의 또 다른 현실로 믿고 몰입해야 한다.”20Caillois 2017, p. 46.

우르키자의 작품 《뻐꾸기》는 바로 이러한 가장무도회를 절묘하게 파고든다. 장난기 가득한 뻐꾸기가 뿜어내는 유쾌한 에너지는 금세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전염된다. 작품 속 뻐꾸기는 우아한 궁정 춤을 흉내 내는데, 다소 엉뚱하고 어설프지만 매력적이다. ‘재미있고 귀여운(funny-cute)’ 느낌이다. 작곡가는 후안 델 엔시나(Juan del Encina)의 르네상스 마드리갈 《뻐꾸기, 뻐꾸기, 조심해, 너도 그렇게 될지 몰라》라는 원곡을 날카롭고 기발하게 편곡한다. 도입부에는 뻐꾸기 특유의 3도 화음이 울려 퍼진다. 작곡가는 이 소리를 일부러 음정이 부정확하게 나는 슬라이드 휘슬에 얹어, 다소 엉성하고 흐트러진 듯한 연주로 들려준다. 템포 역시 의도적으로 쾌속 질주하듯 몰아붙이는데, 이는 그가 주무르는 르네상스 화성법과 맞물리며 잔뜩 과열된 분위기를 연출한다. 우르키자는 슬라이드 휘슬을 부는 뻐꾸기를 이 짧은 곡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 캐릭터를 더욱 도드라지게 벼려낸다. 무대 위 뻐꾸기의 시늉 놀이는 원곡에서보다 한결 더 귀여워진다.

우르키사는 과거의 음악 역사적 유산을 바탕으로 하되, 인공적인 방식으로 동물을 묘사한다. 작품 속 뻐꾸기는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뻐꾸기를 흉내 내는 인간의 소리다. 음악은 장난스럽고 다의적이며, 조소 섞인 농담을 던진다. 그야말로 한 편의 가면무도회다. 뻐꾸기 가면을 쓴 연주자는 가면 뒤에서 관객에게 짓궂게 낼름 메롱하며 장난을 친다. 우리는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가지만, 오히려 그 속임수를 유쾌하게 즐긴다.

크리스텐센의 음악이 어린 시절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건드린다면, 우르키자의 작품은 모방과 속임수의 즐거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두 작품을 묶어주는 것은 무대 위에서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것의 즐거움, 관객을 향해 찡긋 윙크를 건네는 듯한 장난스러운 소통이다. 이것이 바로 귀여움의 수행(Performing cute)이다.

‘큐트 퍼포먼스’ – 바비 인형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

“바비 인형은 핑크색이고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이지만, 귀엽거나 앙증맞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안네카트린 코후트는 우리 어린 시절의 바비 인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반면 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 「바비」(2023)에 등장하는 바비는 취약함을 드러내는 순간 귀여워진다. “바비 특유의 뻣뻣함과 완벽함이 사라질 때, 딱딱하고 완고하던 태도가 부드러워지고 가면처럼 규격화된 태도가 갑자기 따뜻하고도 전혀 예상치 못한 감정적 반응으로 툭 터져 나올 때”21Kohout, Annekathrin: “The new cuteness”, ZEIT online 2023, 
https://www.zeit.de/kultur/2023-07/cuteness-anglizismus-zeitgeist-verletzlichkeit (29.06.25).
귀여움이 피어난다.

‘큐트 퍼포먼스’는 불완전한 것,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약점이 아닌 강점으로 승화한다. 이는 가부장제를 향한 은밀한 저항이자, 일종의 팝 페미니즘적 실천이다. 물론 거윅 감독의 바비 역시 핑크색, 금발, 정형화된 미인 등 전형적인 여성상을 담은 서사를 재생산하기도 한다. 그러나 팝 페미니즘은 이처럼 (내면화된) 남성 시선을 똑똑히 자각한 채, 타인이 규정한 프레임과 스스로 주도하는 권력화된 수행 사이의 간극을 교묘하게 비틀며 놀이로 삼는다. 요바나 라이징어(Jovana Reisinger)는 에세이 “핑크, 걸리시함, 스타일링은 해방을 갉아먹는 독이 아니다. 오히려 전복적인 권력의 도구다. […] ‘투시’는 타인에게 비치는 자신의 외양을 온전히 즐긴다. 그는 인위적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기꺼이 하나의 예술품(Kunstobjekt)이 된 것이다.”22Reisinger, Jovana: “The subversive power of the chick, or: In Barbiecore against the patriarchy”, Vogue 2022, 
https://www.vogue.de/mode/artikel/subversive-kraft-der-tussi-barbiecore-feminismus-jovana-reisinger (23.07.24).
‘투시’는 현실과 놀이 사이에서 외줄타기 하며 하나의 역할을 연기한다. 이는 사회적 규범을 거부하는 행위인 동시에, 성별 고정관념을 극대화한다.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그 고정관념이 얼마나 단순하고 얕은 수준인지를 낱낱이 드러낸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비 인형은 단순히 여성성이 투영되는 대상이 아니다. 바비는 뷰티 소비주의와 인위적인 표면성, 배타적인 걸 문화(girl culture)를 긍정하는 상징이 된다. 걸 문화는 바비 세계관과 그 규칙을 받아들여야만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배타적이다. 하지만 거윅 감독의 바비는 자신의 외모와 액세서리를 가면 삼아 주도적으로 놀이를 이끄는 주체적 행위자다. 그는 타인을 매료시키고 호감을 얻고 싶어 한다. 그의 놀이에 동참하고 그 가면의 세계에 몰입하는 사람은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바비가 약속한 비전에 함께한다. 그곳은 바비가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걱정 없이 스스로 섹시하다고 느낄 수 있는 세계, 귀여움이 (여성적) 수행성의 일부로서 하나의 당당한 권력 기반을 차지하는 세계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빌리 아일리시의 노래 〈What Was I Made For〉가 흘러나온다. 숨결이 섞인 가볍고 부드럽고 가녀린,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목소리. 아일리시는 자신의 부서짐과 불완전함, 취약함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낸다. 강인함과 우렁참을 강요하는 세상의 명령에 맞선다. 목소리로 섬세하게 빚어낸 존재론적 회의감은 팬과 청중 마음에 깊은 울림을 일으키며, 친밀감, 안도감, 연민과 유대감의 표현이 된다. 이때 아일리시는 20세기 초 마이크 발달과 함께 등장한 가창 기술인 크루닝(Crooning)23크루닝(Crooning)은 마이크에 가까이 대고, 지지 없이, 힘을 주지 않고, 때로는 숨소리가 많이 섞이거나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친밀하게 느껴지는 팝 보컬 기법이다. 기법을 끌어온다. 전통적인 성악 발성이나 벨팅(Belting)24벨팅(Belting)은 팝과 록에서 이제 표준화된 보컬 기법으로, 큰 소리로 가슴 목소리로, 후두를 위로 밀어 올린 상태에서 노래하는 방식이다.에 비해 크루닝은 더 나직하고 부드럽고 힘들이지 않은 느낌을 준다. 말소리와 더 가까워서 노랫말도 또렷하게 전달된다. 아일리시는 거윅 감독의 바비가 드러내는 취약한 내면에 감정적 색채를 입혀낸다. ‘급진적 부드러움(Radikale Sanftheit)’는 그의 목소리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다. 연약하지만 결코 약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단숨에 파고드는 힘을 가진…

아일리시의 이러한 목소리 구사 방식은 남성의 목소리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결정적인 요소는 음역보다는 목소리에 담긴 의도와 태도, 표현 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귀여움은 결코 걸컬처에 국한되지 않는다. 귀여움이라는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분법적 성 역할이란 감옥에서 벗어나야 한다. 안네카트린 코후트의 논의를 이어받아, “‘걸컬처’를 성별이 아니라 하나의 미학”으로 이해해야 한다.25Kohout, KUNSTFORUM 2023, p. 59. 그러므로 성별의 경계를 허무는 열린 의미로서 별표를 붙인 걸을 바라보고, 문화적 테두리가 고정되지 않은 채 느슨하게 열려 있다고 전제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남성들 (혹은 보이즈*) 또한 귀여움을 수행하기 위해 여성들*(Frauen*), 걸즈(Girls*)와 같은 표현 수단을 이용한다고 말이다. 카운터테너 비니 마르키(Vinny Marchi)가 커버한 〈What Was I Made For〉는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26https://youtu.be/h57O_VEf65U?si=AlGO63wrzTvxm0eu (23.07.25). 그는 가성으로 바비의 연인인 켄의 역할을 노래한다. 이로써 귀여움과 그 안에 내재된 젠더적 함의는 (포스트)아이러니한 반어법적 가면이 된다. 그의 목소리는 아일리시보다 좀 더 알맹이가 있고 숨소리도 덜 섞여 있지만, 그럼에도 의도적으로 연약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그는 (과거에) 여성적으로 코드화된 표현 수단과 속성들을 그대로 흡수함으로써, 귀여움이 지닌 성별적 함의를 재구성하고 극복한다. 그의 커버가 증명하듯, 귀여운 목소리는 성별과 무관하게 철저히 계산된 수행(Performance)이다.

다음 호에 이어질 〈꺄항! ‘귀여움’이라는 현대 미학 현상 #2〉도 기대해 주세요 🐱

글 | 클레멘스 K. 토마스 Clemens K. Thomas

클레멘스는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요하네스 셸호른(Johannes Schöllhorn)과 코르넬리우스 슈베어(Cornelius Schwehr)에게 작곡을 공부했다. ‘귀여운 오페라(cute opera)’에 관한 예술 연구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앙상블 리셰르셰의 예술 감독을 역임, 현재는 프리랜서 큐레이터로서 앙상블 레조난츠(Ensemble Resonanz), 괴팅겐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과 함께 활동한다.

번역 | 김기민
클리어아이(clear-i) 수석 컨설턴트 / 프리랜서 번역가

95호_VIEW 2026.07.16.

작곡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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