꺄항! ‘귀여움’이라는 현대 미학 현상 #2

작곡가, 큐레이터

앞서 발행된 〈꺄항! ‘귀여움’이라는 현대 미학 현상 #1〉을 먼저 읽어 보세요!🐱

누가 누구를 위해 연주하는가?

스스로 귀여움을 자처하거나 선의로 자신을 낮추는 행위, 즉 귀여움은 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유희(game)의 맥락 안에서는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여기서 도대체 누구를 위해 연주(연기)하고 있는가?” 귀여움은 여성과 여성의 신체를 낮추고 객체화하며 성적으로 대상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러한 “강조된 무력감과 취약성의 미학”1Ngai, Sianne. “The Cuteness of the Avant-garde” [2005]. In The Cute and the Gimmick. Leipzig, 2022, 101.은 보호 본능과 돌봄의 욕구를 자극할 뿐만 아니라 “귀여운 대상을 지배하고 굴복시키려는 공격적인 욕망”2Ngai, The Cute and the Gimmick, 108.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시안 응아이(Sianne Ngai)가 지적했듯 능동적인 관찰자와 수동적인 귀여운 대상 사이의 관계는 폭력성을 내포한다.3https://youtu.be/LyQs4EC7ong?si=bYAgkjmpCFpqIDi4 (접속일: 2024. 08. 06.).

이어지는 논의에서는 다음 두 가지 개념이 핵심이다.

  • 주체성(Agency): 문화적·사회적 구조 안에서 주체가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특히 주변화된 집단의 맥락에서 이 용어는 주체적인 행동 능력과 헤게모니적 규범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 남성적 시선(Male gaze): 페미니즘 영화 비평에서 유래했다. 일상 언어에서는 여성을 대상화하고 신체적·성적 외모로 단순화하여 바라보는 남성 중심적 시각을 비판하는 데 사용된다.
Nina Fukuoka — The Final Girl

니나 후쿠오카(Nina Fukuoka)는 여성 하프 연주자를 위해 특별히 작곡한 곡 《The Final Girl》에서 약자로 간주되는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적 시선을 다룬다. 이 작품은 하프라는 악기에 부여된 젠더 이미지와 “착한” 하프 연주자라는 고정관념을 탐구한다.4https://youtu.be/LyQs4EC7ong?si=bYAgkjmpCFpqIDi4 (접속일: 2024. 08. 06.).아름다운 하프 소리와 함께 “하프를 연주하는 귀여운 소녀”(Cute Girl Playing Harp)라는 비디오 자막이 흐르고 1분 뒤, 20세기에 주로 “히스테리” 진단을 받은 여성들에게 시행되었던 잔혹한 수술인 뇌절제술(Lobotomy)을 시연하는 남성의 손이 나타난다.5Schlich, Thomas. “Cutting the body to cure the mind.” The Lancet Psychiatry, Vol. 2 (2015), 390. 후쿠오카는 천사 같은 하프 연주자의 전형적인 이미지와 “파이널 판타지”의 팝컬처적 요소, 흑백 할리우드 영상, 그리고 여성 히스테리에 관한 의학사적 담론을 결합한다. 작곡가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이른바 의학적 질환으로 여겨졌던 많은 증상들은 그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여성 섹슈얼리티의 징후일 뿐이었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여성 히스테리는 20세기까지 의학 용어로 계속 사용되었다.”6https://vimeo.com/326196065 (접속일: 2024. 08. 06.).

조금 더 느슨하게 해석해보면, 《The Final Girl》은 한 소녀, ‘큐트 걸’인 주인공이 모험을 헤쳐 나가기 위해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남성적 시선에 의해 하찮게 취급되고 “히스테리적”이라 여겨진다. 이 영상은 하프와 여성성, 그리고 귀여움 사이에 얽힌 연상 작용의 네트워크를 “히스테리” 및 그 치료법(더 정확히는 그로 인한 학대)과 대비시킨다. 후쿠오카는 매우 뚜렷하고 명료하게 성별에 따른 선입견과 권력의 격차를 보여준다.

귀여움은 보호 본능을 깨운다. 작곡가는 이러한 보호가 제약과 금지로, 최악의 경우에는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귀여움이 스스로 부여한 속성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부여된 것일 때, 주체가 주체성을 부정당하고 남성적 시선에 의해 객체화될 때, 귀여움은 하나의 코르셋이 된다.

기술의 문제

다음 예시는 여성의 자기표현에 대한 규범적 통제의 사례로도 읽힐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과 기계 사이 어딘가에 있는 사이보그 목소리를 향한 음성적 소외다. 그리고 레거시 러셀(Legacy Russell)의 글리치 페미니즘(Glitch Feminism)7Russell, Legacy. Glitch Feminism: A Manifesto. Leipzig, 2021.을 바탕으로 논하자면, 우리는 기계의 오류 가능성을 환호한다. 디지털로 통제되는 목소리가 규범적 코르셋을 뚫고 나올 때 말이다.

먼저 2011년에 공개된 위의 “eHarmony Video Bio” 영상을 살펴보자. 데비(Debbie)는 “고양이가 정말 좋아요(I love cats!)”라는 말과 함께 순간 감정에 대한 조절 능력을 상실한다. 고양이에 대한 사랑에 압도된 것이다. 다소 과장되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진정성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영상은 연출된 장면으로, 엔터테이너 카라 하트만(Cara Hartmann)의 퍼포먼스다.

이후 유튜브에 오토튠 매시업 영상인 “Can’t Hug Every Cat”이 등장한다. 데비(Debbie)의 원본 영상에서의 말들이 편집되어 가사가 되고 노래가 만들어진다. 데비의 목소리는 오토튠을 거쳐 노래로 바뀐다. 그 사이사이에는 음악을 만드는 고양이들이 들어간다. 그녀의 감정적 분출은 오토튠이라는 효과 덕분에 음성적으로, 팝송이라는 틀에 의해 형식적으로 통제된다. 즉 “올바르고” 표준화된 형태로 강제되는 것이다. 자발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감정의 표현은 후렴구가 있는 팝송이 되고, 이로써 재현 가능한 제스처, 즉 경쾌하고 중독성 있는 멜로디가 된다.

오토튠은 1996년 음정 보정 도구로 개발되었고, 1998년 셰어(Cher)의 노래 《Believe》에서 용도를 벗어나 사용함으로써 팝음악의 새로운 아이콘을 만들어 냈다. 보정이 아니라 귀에 들리게 효과를 사용한 것이다. 오토튠 보컬은 인위적이고, 매끄러우며, “탈신체화”(disembodied)된다. 그 매력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친밀함과 소외감, 진정성과 인공성, 동일시와 타자성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양가성이다. 오토튠 효과는 보컬이 의도적으로 음정을 벗어나 부를 때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오토튠 효과를 살려서 노래하는 것은 “인간과 기계의 듀엣”이다.8Åkervall, Lisa. “The truth of Auto-Tune.” Navigations: Journal for Media and Cultural Studies, 2/2015, 94. 오토튠은 디지털로 생성된 표준화이자 보컬 개성의 평준화를 의미한다. ‘제네릭 페이스’ 개념9필터를 사용해 집단의 평균적이고 원형적 얼굴을 만들어낸 현상. Kohout, Annekathrin. “Look at me!,” ZEIT, June 10, 2025. https://www.zeit.de/2025/22/filter-soziale-medien-instagram-tiktok-aussehen-gesicht을 따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오토튠은 스타일적 미세함이나 음정의 불완전함이 없는 ‘제네릭 보이스'(generic voice, 일반화된 목소리)라는 이상을 창출한다. 오토튠 처리된 목소리는 익숙하고, 비특정적이며, 대체 가능하다. 목소리(그리고 노래하는 신체)에서 개성이 사라지면 그 자리는 대중의 욕망을 투영하는 공간이 된다. 이는 대중문화로의 접근성을 높이고, (주목을 이끌어내는) 파급력 면에서도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낸다.

모방(mimicry)의 관점에서 오토튠은 디지털 변조라는 가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기계 역시 실수를 저지를 수 있고 디지털 이펙트는 인공물을 만들어내므로, 글리치 그 자체는 감동적이고 청각적인 “기계의 귀여움”이라는 귀여운 잠재력을 품는다. 기술적 불완전함을 의도적이고 인위적으로 드러내는 스타일적 장치로서 오토튠은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으며, 실로 “인간과 기계 사이의 새로운 형태의 친밀함”으로 설명될 수 있다.10Åkervall, “The truth of Auto-Tune,” 94.

고양이에 대한 데비의 사랑은 처음부터 연출된 연기였다. 하지만 우리는 원본 영상에서보다 오토튠 매시업 영상에서 그녀에게 더 쉽게, 심지어 유희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 그녀의 목소리를 탈인간화하는 이펙트는 역설적으로 데비의 감정을 더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만든다. 감정의 분출과 그에 대한 청각적·기술적 통제 사이의 역설로서 오토튠 목소리를 들어보자. 다시 말해, 애정 표현 역시 하나의 기술 문제임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모든 고양이를 안아줄 필요는 없다.

그녀의 목소리를 탈인간화하는 음성 변조 효과는 데비의 감정을 오히려 더 공감하기 쉽게 만든다. 오토튠 처리된 목소리는 감정적 폭발과 그에 대한 음성적·기술적 통제라는 모순을 청각적으로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애정의 표현이 기술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모든 고양이를 안아 볼 필요는 없다.

프랭크의 귀를 핥다.

유튜브 채널 ‘ASMR Zeitgeist’11https://www.youtube.com/@asmrzeitgeist (접속일: 2025. 06. 12.).를 둘러보다 보면 프랭크(Frank)를 만나게 된다. 프랭크는 귀가 달린 ASMR 전용 인공 두상(dummy head) 마이크 장치이다. 이 마이크는 ASMR이라는 디지털 방식으로 전달되는 ‘케어 오디오’의 전형적인 특징인, 초근접 마이킹을 통해 공간적이고 청각적인 내밀함의 포착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다.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자율감각쾌락반응)은 심리 감각적 효과로서 촉각이 아닌 자극을 받아 두피와 척추를 따라 약하게 지릿지릿한 떨림이 느껴지는, 흔히 닭살이 돋는 것과 비슷한 현상을 의미한다. ‘팅글'(tingles)이라 불리는 이러한 효과는 조용한 소리나 속삭임 같은 자극, 이른바 ‘트리거'(trigger)에 의해 유발된다. ASMR은 수백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온라인 현상으로, 휴식, 진정, 수면 유도 또는 감정 조절을 약속한다.

이때에 사용되는 것은 두 개의 독립된 마이크가 장착된 인공 두상인데, 보다 정확한 소리의 포착을 위해 사람의 귀를 본뜬 모양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음원은 마이크에 극도로 가까이, 심지어 마이크에 닿을 정도로 접근되는데, 이는 일반적인 녹음 기술에서는 피하는 방식이지만, 극도의 친밀감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이다. “친밀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이처럼 미세한 소리들을 청취자가 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12Smit, Naomi et al. “ASMR, affect and digitally-mediated intimacy.” Emotion, Space and Society (2018), 5. https://doi.org/10.1016/j.emospa.2018.11.002 우리는 오직 헤드폰을 통해서만 그 현장에 참여한다. 청취자는 현장과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거리를 두고, 주변으로부터 청각적으로 고립된 상태에 있다. 음향 증폭 과정에서 배경의 소음이나 프리앰프의 기계 잡음까지 함께 증폭되는 것은 매력과 미학의 일부이다. 이 경우에도 매체는 숨겨지지 않고,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된다. ‘ASMR Zeitgeist’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서사적·시각적 요소도 있다. 마이크들의 이름은 프랭크, 알렉스, 밥이며, 소리에 반응하는 애니메이션 눈동자가 그려져 있다. ‘ASMR Zeitgeist’는 기술을 의인화하고 귀엽게 다듬은 이미지로 재탄생시킨다.

안락함의 미학이라는 관점에서 ‘귀여움’을 볼 때, ASMR은 청각적 안식처가 된다. 우리에게 친숙한 온갖 사소한 것들로 꾸며진 이 공간은 우리에게 신체적, 정신적 안락함을 선사한다. 이는 청취 과정에서 생성되는 상상의 공간으로, 헤드폰을 쓰고 고립된 상태로 우리가 실제로 위치한 공간과는 경계를 넘나들며 존재한다. 이 공간에서는 친밀감이 암시되거나 기술적으로 전달된다. 인공 두상은 나의 아바타가 되고, 그 모형이 듣는 소리는 곧 우리의 소리가 된다. 이것은 흥미로운 전환이다. 우리는 속삭이는 화자보다는 그 앞에 놓인 마이크와 자신을 더 동일시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공 머리 ‘프랭크’가 되어 고양이가 우리 귀를 핥는 것을 즐기면서도, 동시에 그 거리감에 안도한다. 고양이 침으로 방금 축축해진 귀가 우리의 귀가 아니라 프랭크의 귀라는 사실에 말이다.

멜라니 마르티네즈의 《Dollhouse》, 거짓된 안락함이 펼쳐지는 무대

Melanie Martinez – Dollhouse

멜라니 마르티네즈(Melanie Martinez) 역시 온갖 사소한 것들로 안식처를 꾸미지만, 안락함 대신 불쾌감이 느껴진다. 그녀의 노래 《Dollhouse》(2014)에서 귀여움은 불안한 심연을 은폐하는 동시에 암시하는 안락한 표면으로 드러난다. 즉 “크리피 큐트”(creepy-cute, 기괴하면서도 귀여운)다. 《Dollhouse》에는 겉으로 ‘완벽한’ 가족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인형 가족이 살고 있다. “완벽하다”고 포장한다. “얘야, 벽을 열어봐 / 너의 인형들을 갖고 놀아보렴 / 우리는 완벽한 가족이 될 거야.”(Hey girl, open the walls / Play with your dolls / We’ll be a perfect family.) 마르티네즈는 겉보기에 완벽한 이 중산층 인형 가족의 딸을 노래한다. 그런데 허울 뒤에 숨은 가족의 실상은 알코올 중독, 마약 복용, 불륜으로 채워져 있다. 마르티네스는 이 완벽한 가식의 겉치레를 인형의 집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폭로한다. 시각적 미학은 소녀스럽고 천진난만하게 귀여운 세계와 그 안에 담긴 잔혹함 사이를 오간다. 자기만의 집이 주는 안락함과 아늑함은 불안함으로, 기괴함으로 뒤바뀐다. 여기서 전복의 수단으로서 귀여움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인형의 집은 규범적 가치의 표상으로 기능하며, 그 이면에는 “벅찬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복잡함을 덜어내고 싶어 하는 욕망, 즉 생물학적 핵가족과 같은 개념이나 ‘명확한'(흔히 핑크색과 파란색으로 구분되는) 성역할의 재현에 대한 (재)참조”13Zipfel, Hannah. “Uncannily cute!? Creepy-cute femininity in Melanie Martinez.” In #cute: Islands of bliss, edited by Richard et al., 68. Bielefeld, 2020.가 숨어 있다. 그러나 이 반짝이고 매끄러운 인형의 외관은 비틀린 가족의 역학을 가리기 위한 거짓된 연출일 뿐이다. 여기서 “크리피-큐트”는 귀여움이 위협적인 면모를 띠고, 익숙했던 어린 시절의 놀이 세계가 기이함으로 뒤바뀌는 전환점을 보여준다. 장난감이자 무생물이고 감정 투사의 대상인 인형은 독자적인 생명력을 얻으며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환상 속에서 벗어나게 된다.

음악적으로도 《Dollhouse》는 이러한 긴장감을 뒷받침한다. 도입부의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는 어린 시절의 덧없음을 암시하는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인형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태엽 장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기계적인 정밀함은 생명력을 얻은 인형의 집에 진정한 인간미가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더욱 강화한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글로켄슈필과 실로폰은 이 곡에서 두드러진 음색이다. 이들은 장난스럽고 순수하며 무해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여기에 멜라니 마르티네즈의 부드럽고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이와 대조적으로 배경음에서는 섬뜩한 소음이 들리고 위협적인 종소리가 깔린다.

귀여움을 안락함의 미학으로 볼 때, 인형의 집은 전통적으로 바로 이러한 안락함을 상징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안정감, 보호받는 느낌, 소속감, 나아가 온전한 세상이 인형의 집 안에서 재현된다. 마르티네즈는 이러한 공간이 지닌 인위적인 속성을 폭로한다. 마르티네즈는 자신에게 부여된 수동적인 인형의 역할에 반기를 들면서 중산층 인형의 집이 주는 안락함에 균열을 만들기 시작한다. 마르티네즈의 입장에서 인형의 집은 완벽한 세상이 아니라 감옥이다.

안락함은 자유와 안전 사이의 줄타기이다. 경직된 자유와 과잉 보호적인 안전은 불편하고 섬뜩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줄타기에 성공하면, 아늑한 안도의 공간이 생겨난다. 안전과 안녕이 자유 및 자기 실현에 대한 열망과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안락함은 관계에서 비롯된다. 개인과 그들의 안식처, 곧 안전지대 사이의 관계다. 결국 안락함을 느끼는 것은 수동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적극적으로 가꾸어 나가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안락함(Comfort)”은 “돌봄(care)”을 전제로 한다. 내가 공간을 가꾸고 가다듬을 때(care), 비로소 그 공간이 나를 위로하고 다독이며 기분 좋게(comfort) 만들어준다.

지킴이(preservative)로서의 귀여움

마지막으로, 이러한 역동적인 관계를 친연성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귀여운 동물 미디어가 자극적인 재미를 끌어내기 위해 동물을 소셜 미디어 맞춤형 프레임 안에 가두는 것과 달리, 크리스티네 헬게르센(Kristine Tjøgersen)은 이와 대비되는 서사를 제시한다. 그의 작품 《Starry Night》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탈인간주의적 유토피아를 만들어내며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헬게르센은 동물을 귀엽게 만들거나 인간화하는 대신, 인간 중심적 시야를 넘어선 인간, 동물, 환경의 공생을 탐구한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작품은 이 글의 핵심 주제인 ‘가꾸어지고, 보살펴지며, 위계가 없는 관계성’에 대한 관심과 결을 같이 한다. 《Starry Night》은 자연을 지배하거나 보호해야 할 타자이자 낯선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관계망 속의 동등한 주체로서 받아들일 것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울림이 깊게 남는 아르페지오로 치터(zither)의 화음이 울려 퍼진다. G장조와 D장조, 그리고 C장조와 F장조의 화음들이 서로 겹쳐지고 얽혀든다. 풍부한 뉘앙스를 담아 위치를 바꾸고 겹쳐지는 이 화음들은 곡 전체를 통틀어 유일한 화성적 바탕을 이룬다. 두 화성은 유기적으로 숨 쉬듯 느릿한 템포로 번갈아 나타나며 잔잔하게 흔들린다. 베이스 클라리넷과 소프라노 색소폰은 미분음으로 떠도는 배음을 보탠다. 바이올린은 새의 지저귐 같은 고음역의 트레몰로를 연주하고, 베이스 클라리넷은 멀티포닉 트릴을 얹는다. 소음처럼 윙윙거리는 첼로, 그러다 ‘우우우’ 노래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등장하며 다성부 노래로 이어진다. 보코더를 거친 목소리는 전자 음향과 결합한 하이브리드 음성으로 변모하지만, 유기적인 소리의 혼합체 속에 자연스럽게 머문다. 이어 거의 동시에 녹음된 새들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플루트는 트릴과 소용돌이치는 듯한 음형을 만들어내고, 바이올린은 부드러운 하모닉스를 연주한다. 소리풍경은 점차 아득해지고, 희미한 잔향만을 남긴 채 마침내 정적 속으로 사라진다.

이 곡은 바우어새와 그들의 독특한 구애 행동에서 영감을 받은 음악극 《BOWER》의 일부다. 바우어새는 주변의 재료들을 모아 정성스럽게 지은 구애 장소인 정원(bower)으로 암컷을 감동시켜야 짝을 얻을 수 있다. 작곡가는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이 바우어를 먼 미래의 깊은 숲속에 배치했으며, 주목의 중심에 있는 것이 새인지 인간인지 불분명해진다.”14https://kristinetjogersen.no/BOWER (접속일: 2024. 10. 14.). 탈인간주의적 유토피아로서 이 음악은 인류와 자연,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메시지도 던진다. 이 유토피아는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가 제안한 ‘크툴루세'(Chthulucene) 개념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크툴루세는 인간중심적 통제를 넘어 모든 생명체가 서로 얽혀 함께 미래를 만들어가는 시대다. “크툴루세에서 공생하여 일하고 유희하는 것은 지구의 생물다양성이라는 동력을 재창조하는 일이다. 인류세 및 자본세와 달리, 크툴루세는 지속되는 이야기들과 종을 넘나드는 ‘함께-되기’의 실천들로 이루어진다. 이 시대의 지속 여부가 위기에 처해 있다. […] 우리는 서로에게 사활이 걸린 존재다.”15Haraway, Donna. 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Frankfurt, 2018, 80.

헬게르센의 작품에서 자연은 다면적이고 서로 얽혀 있는 실재이자, 인간과 비인간, 즉 “인간 너머”의 존재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창조적(co-creative) 상호작용으로 경험된다. 《Starry Night》에서 보코더를 사용한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보코더는 인간과 기계의 하이브리드 형식인 동시에, 기술과 인간, 자연이 공존하는 미래의 탈인간중심적 이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차분하게 들려오는 보코더 효과가 가미된 노래는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자장가를 떠올리게 한다. 자연, 혹은 상상 속의 자연에서 비롯된 이 안락한 효과는 보호하는 자와 보호받는 자 사이의 관계를 확장한다. 우리가 자연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자연 또한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는 주고받음, 그리고 ‘함께-되기’다.

《Starry Night》은 비판적이고 거리를 둔 관찰에 관한 작품이 아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정반대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간의 파괴 행위는 여기서 다루어지지 않는다. 바이올린은 지저귀고, 첼로는 감미롭게 목소리를 떨며, 플루트는 황홀한 속삭임을 만들어내고, 배음은 공중을 떠다닌다. 자연을 모방하는 것에서 출발한 소리는 예술적으로 확장되고 미적인 것이 되어, 작곡가가 포착해 낸 하나의 소리 파편이자 상상의 공간으로 재구성된다. 우리는 그 공간 속에 몰입하고, 나아가 인위적이거나 예술적인 설정, 그 조각 자체를 기꺼이 잊어버린다. 《Starry Night》은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이 아니라, 허구적이고 이상화된 자연을 보여준다. 지금 목격하고 있는 자연의 목가적 풍경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 대한 비판이나 성찰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들 어떠한가? 반짝이면서도 아슬아슬하게 부서지기 쉬운 생동감과 색채로서의 아름다움을 함께 지키고, 보살피고, 가꾸어 나가는 태도가 《Starry Night》에 깊이 새겨져 있다는 점만큼은 변함이 없다. 어쩌면 이런 맥락에서라면, ‘귀여움’은 그리 나쁜 지킴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도나 해러웨이는 이렇게 썼다. “어떤 생각으로 생각을 생각하는가가 중요하고, 어떤 서사로 서사를 이야기하는가가 중요하다.”16Haraway, Staying with the Trouble, 59. 헬게르센의 《Starry Night》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도피주의와 유토피아, 그리고 현실 직시가 뒤섞인 가운데, 우리가 관계를 어떻게 새롭게 형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음악적)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 마음을 열 수 있는지, 어떻게 적극적으로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는지, 그것을 위해 우리 자신을 열고 취약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지. 우리가 타자 및 타자성(otherness)과 어떻게 개방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지, 그 차이를 어떻게 기꺼이 받아들이고 견뎌낼 수 있는지. 더듬이를 바깥으로 길게 뻗은 세상에 마음을 열고 공감하며 종의 경계를 넘어 관계의 그물망을 어떻게 엮어나갈 수 있는지. 개인의 강함과 존재론적 위대함이라는 규범에 어떻게 급진적이면서도 다정하게 저항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조용한 이야기가 그저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세상의 불길을 꺼뜨리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주는 온기와 마음속 불꽃이 필요함을 깨달으며, 우리가 이 모든 노력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는지를 말이다.

글 | 클레멘스 K. 토마스 Clemens K. Thomas

클레멘스는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요하네스 셸호른(Johannes Schöllhorn)과 코르넬리우스 슈베어(Cornelius Schwehr)에게 작곡을 공부했다. ‘귀여운 오페라'(cute opera)에 관한 예술 연구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앙상블 리셰르셰의 예술 감독을 역임, 현재는 프리랜서 큐레이터로서 앙상블 레조난츠(Ensemble Resonanz), 괴팅겐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과 함께 활동한다.

번역 | 김기민
클리어아이(clear-i) 수석 컨설턴트 / 프리랜서 번역가

Notes

97호_VIEW 2026.08.20.

작곡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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