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학자가 축구를 ‘감상’하는 법

음악연구소장

후반 45분이 지나자 대기심이 보드를 들어 올립니다. ‘+5’. 그런데 5분이 지나도 종료 휘슬은 울리지 않습니다. 96분, 97분, … 지고 있는 팀의 서포터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서고, 이기고 있는 팀의 골키퍼는 골킥을 차려다 말고 느닷없이 신발 끈을 고쳐 맵니다. 이 경기는 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요? 답은 허무할 만큼 간단합니다. 주심이 끝났다고 판단할 때 끝납니다.

전광판이 모르는 시간

축구의 경기 시계는 원칙적으로 멈추지 않습니다. 공이 밖으로 나가도, 반칙이 선언되어도, 선수가 쓰러져 있어도 시간은 그대로 흘러갑니다. 그렇게 흘러간 시간 중 주심이 보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만큼을 전후반 끝에 덧붙이는 것이 추가시간입니다. 국제축구평의회(IFAB)의 『경기규칙(Laws of the Game)』 제5조는 경기 시간 계측을 주심에게 맡기고, 제7조는 손실된 시간의 보충 규모 역시 주심이 정하도록 규정합니다. 그래서 경기장 전광판의 숫자는 관중과 중계를 위한 안내일 뿐, 종료 시점을 결정짓지는 못합니다.

이 재량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는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이 보여 주었습니다. 잉글랜드와 이란의 조별리그 경기에서는 전반 종료 후 약 14분, 후반 종료 후 13분 넘게 경기가 이어지며 총 경기 시간이 117분 16초에 달했습니다. 게다가 대기심이 들어 올리는 숫자는 ‘최소한’의 기준입니다. 규정상 추가시간은 늘릴 수는 있어도 줄일 수는 없습니다. 4분이 떴다고 해서 반드시 4분 정각에 끝나는 것은 아니지요

세 가지 경기, 세 가지 시간

축구가 유별나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종목마다 시간과 ‘끝’이 관계 맺는 방식이 다르고, 이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계를 멈추는 방식입니다. 농구, 미식축구, 아이스하키에서는 규칙이 정한 중단 상황에서 경기 시계 자체를 멈춥니다. 여기서 시간은 경기 내에서 배분되는 내부 자원입니다. 아껴 쓰고, 타임아웃으로 붙잡아 두며, 마지막에는 흘려보내면서 지켜냅니다.

두 번째는 시간이 경기의 끝을 직접 결정하지 않는 방식입니다. 야구, 테니스, 골프에서는 이닝, 세트, 홀 같은 구조가 완결되어야만 경기가 끝납니다. MLB는 이닝 수의 상한이 없어서 동점이 이어지는 동안 연장 이닝을 계속하므로 경기 시간이 이론상 얼마든지 길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리그가 따로 상한을 두기도 합니다. KBO 리그는 2025년부터 정규시즌 연장을 11회까지로 줄였지요. 그런데 상한을 얹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 구조에는 본래 끝이 예정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 방식이 바로 축구입니다. 바깥세상의 평범한 시간이 경기를 관통하며 흐르고, 그 시간이 다했다고 주심이 판단할 때 비로소 경기가 끝납니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합니다. 앞선 두 방식에서 시간은 철저히 경기에 종속됩니다. 멈춰 세워지거나, 경기의 끝을 정하는 기준에서 아예 밀려납니다. 이와 달리 축구는 시간이 경기에 무심하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축구의 시계는 공이 살아 있는지, 누가 다쳤는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축구는 경기의 시간이 아니라 세상의 시간을 잽니다. 그리고 세상의 시간을 재기 때문에 경기장 밖 현실에서 시간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 그대로 작동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흘러가고, 결코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축구의 시간은 비축되지 않고 오직 소모됩니다. 농구의 시간이 관리해야 할 재고라면, 축구의 시간은 새는 물입니다. 전반 12분에 놓친 결정적인 기회는 그냥 사라집니다. 우리가 오늘 잃어버린 한 시간이 그냥 사라지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이지요. 마치 규칙 속에 은밀하게 꿰매 넣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같다고 할까요. 경기라는 것이 원래 현실의 규칙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고안된 장치임을 생각하면 이는 꽤 역설적인 일입니다.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축구의 시간은 멈출 수 없으면서 동시에 들여다볼 수도 없습니다. 농구의 시계는 멈출 수 있지만 모두에게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습니다. 0.0은 누구에게나 0.0이고, 끝은 모두에게 동시에 찾아옵니다. 반면 축구에서는 시계가 멈추지 않는데도 정확히 언제 끝날지가 오직 한 사람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통제할 수도 없고 끝까지 들여다볼 수도 없는 시간. 이것은 점수판이 주는 느낌보다는 운명이 주는 느낌에 훨씬 가깝습니다.

두 개의 시간이 흐르는 경기장

눈치채셨겠지만 이는 음악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음악 이론에서 오래전부터 고민해 온 시간의 문제가 축구장에서 꽤 노골적으로 상연되고 있는 셈입니다.

데이비드 르윈(David Lewin)은 「음악 이론, 현상학, 지각의 양태(Music Theory, Phenomenology, and Modes of Perception)」에서 음악을 지각할 때 여러 종류의 시간이 함께 작동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가운데 이 글에 필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소리의 물리적 진행을 재는 시계 시간(clock-time)입니다. 균질한 직선이 있고 사건은 그 위의 한 점에 놓입니다. 물리학자가 좌표를 찍듯이 말이지요.

다른 하나는 듣는 의식 속에서 구성되는 ‘현상학적 시간(phenomenological time)’입니다. 음악에서 ‘지금’은 결코 한 점이 아닙니다. 방금 들은 소리는 아직 의식에 남아 있고(retention), 곧 이어질 소리는 이미 기대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protention). 그래서 우리는 지금 울리는 소리를 고립된 한 점으로만 떼어 듣지 않습니다. 시계 시간은 바깥에서 눈금을 읽어 얻지만, 음악적 시간은 듣는 동안 만들어집니다.

르윈의 구분을 바탕으로 축구장을 다시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축구장에는 실제로 시계가 두 개 있습니다. 전광판은 시계 시간을 셉니다. 무심하고 균질하게, 바깥에서 말입니다. 주심의 손목시계 역시 같은 시간을 잽니다. 다만 그 눈금이 경기를 끝내지는 않습니다. 경기를 끝내는 것은 주심의 판단입니다. 이 경기에 시간이 실제로 얼마나 주어져야 하는가. 기계적인 눈금판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합니다. 추가시간이란 눈금과 판단이 어긋나는 바로 그 이음매입니다. 전광판이 90:00을 가리키는데도 경기가 끝나지 않는 이유는 애초에 종료의 척도가 그 직선 하나뿐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축구는 전광판이 모르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그 시간을 판정할 사람을 단 한 명 지정해 둔 종목입니다.

끝나는 방식에서 이 차이는 가장 선명해집니다. 농구의 0.0은 순수한 형태의 시계적 종료입니다. 경기는 정확히 한순간에 끝나고, 그 순간은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끝이란 결국 직선이 가닿을 좌표라는 믿음이지요. 축구는 그 점을 거부합니다. 축구의 끝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종료 휘슬은 시계가 어딘가에 도착했다고 보고하지 않습니다. 흐름 한복판에서 내려진 판단을 집행할 뿐입니다. 후반 막바지가 카운트다운이라기보다, 주심이 언제 끝을 선언할지 기다리는 시간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번호 오페라는 농구, 바그너는 축구

이 구분을 오페라로 옮기면 이야기가 갑자기 익숙해집니다.

아리아와 중창 같은 독립 악곡을 이어 붙이는 번호 오페라(number opera)는 각기 닫힌 형식과 뚜렷한 이음매를 형성합니다. 카를 달하우스(Carl Dahlhaus)는 「오페라의 시간 구조(Zeitstrukturen in der Oper)」에서 연극의 연속적인 시간에 오페라의 불연속적인 시간이 맞선다고 정리했습니다. 레치타티보에서는 음악의 시간이 실제 말의 속도에 가까워지지만, 닫힌 악곡에 들어서면 시간이 늘어나거나 아예 멈춰 섭니다. 그리고 아리아가 끝나고 종지가 오면, 청중은 음악이 만든 시간에서 잠깐 빠져나와 박수를 칠 수 있습니다.

달하우스가 덧붙이는 설명이 킥입니다. 한 장면에 겹쳐 있는 여러 시간은 눈에 띄지 않게 수렴하기도 하고 극단적으로 갈라지기도 하는데, 바로 그 갈라짐을 통해 시간 구조 자체가 비로소 의식에 밀고 들어온다는 것. 축구의 추가시간이 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입니다.

반면, 바그너의 무한선율은 그 이음매를 감춥니다. 어디서 한 대목이 끝나고 다음이 시작되는지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흐름이 이어지며, 청중은 그 안에 붙들린 채 손을 들 자리를 찾지 못합니다. 번호 오페라가 농구라면, 바그너는 축구입니다. 하나는 이음매를 드러내 청중에게 잠시 바깥으로 나가 시간을 셀 자리를 내어주고, 다른 하나는 그 자리를 끝내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관람 매너의 문제로 다루는 악장 사이의 박수도 사실 이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종지가 왔다고 확신하여 손을 들었다가 슬그머니 내려놓는 그 민망한 순간은, 단순히 예절을 몰라서 생기는 사고가 아닙니다. 어디까지가 하나의 시간이고, 그 시간이 끝났다고 선언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온몸으로 더듬는 순간입니다. 형태만 다를 뿐 ‘지금 휘슬이 울린 게 맞나?’와 정확히 같은 질문이지요.

끝을 선언할 권한

그렇다면 음악에서 그 권한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지휘자는 연주의 시작을 알리고, 템포를 조절하고, 페르마타를 풀고, 쉼의 길이를 정하며, 마지막 화음이 사라진 뒤의 침묵이 언제 끝나는지까지 결정합니다. 지휘자의 팔이 내려오기 전까지 객석은 숨을 참습니다. 이쯤 되면 지휘자는 단순한 해석자라기보다 공연 시간의 주권자에 가깝습니다.

다만 주심과 지휘자가 하는 일은 다릅니다. 주심은 경기 중 잃어버린 시간을 계산해 나중에 보충합니다. 반면 지휘자는 작품 안쪽의 시간을 실시간으로 늘이고 줄입니다. 한쪽은 시간을 판정하고, 다른 쪽은 시간을 빚어냅니다. 그러나 둘 다 여러 사람이 함께 겪는 시간의 끝을 관장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꽤 도발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형식이 이미 끝났어야 할 지점을 지났는데도 음악이 계속되는 자리, 이를테면 코다(Coda)는 어떤 역할을 하는 걸까요? 우리는 보통 코다를 음악의 끝맺음을 길게 늘이고 단단히 다지는 부분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축구의 추가시간을 나란히 놓고 보면 다른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코다는 형식이 끝났어야 할 순간과 음악이 실제로 우리를 놓아주는 순간 사이의 어긋남을 처리하는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추가시간이 지나가 버린 시간을 온전히 되돌리지 못하듯, 코다 역시 지나간 시간을 복원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 어긋남을 들리게 만들 뿐입니다. 이는 아직 제 안에서도 온전히 정리가 끝나지 않은 생각이라, 여기서는 질문으로만 남겨 두겠습니다.

필멸(必滅)에 동의한 경기

축구가 여전히 사람들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는 까닭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겁니다. 축구는 시간을 도구로 통제하기를 포기하고 자기 조건으로 받아들인 경기입니다. 현실에서 우리에게 시간이 그러하듯 말이지요. 한 문장으로 줄이면, 축구는 필멸에 동의한 경기입니다.

음악은 아주 오래전부터 같은 조건 위에 서 있었습니다. 소리는 울리는 순간 사라지고, 어떤 연주도 되감을 수 없으며, 종지는 예고될 뿐 미리 확정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 조건을 잊기가 쉬워졌습니다. 스트리밍 시대에 음악의 끝은 인터페이스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재생 화면이 남은 시간을 막대로 그려 주고, 우리는 악장이 몇 개인지 미리 확인한 뒤 재생 버튼을 누릅니다. 음악이 끝을 향해 가는 동안, 우리는 그 끝이 어디쯤인지를 눈으로 미리 확인하려 합니다. 마치 전광판의 숫자를 확인하며 축구를 보듯이.

이번 주말에는 한 번쯤 화면을 덮어 두고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채로 듣는 일.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음악에 돌려주어야 할 가장 값진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참고문헌

  • David Lewin, “Music Theory, Phenomenology, and Modes of Perception,” Music Perception 3, no. 4 (1986): 327–92.
  • Carl Dahlhaus, “Zeitstrukturen in der Oper,” Die Musikforschung, 34. Jahrg., H. 1 (Januar–März 1981): 2–11.

99호_VIEW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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