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II] 음악학자 정경영 인터뷰

처절하고 치열하게 감동적인…

책임편집, 공동 연구원


일시: 2025년 11월 7일 금요일 14시-16시 30분
장소: 한양대학교 제2음악관 정경영 교수 연구실

음악학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요. 음악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고요? 음악은 듣고 즐기면 그만이지, 무엇을, 그리고 왜 연구한다는 것일까요. 즐겁자고 듣는 음악에 죽자고 달려드는 게 가당키나 한 걸까요. 음악은 음악일 뿐 오해하지 말자고요.

가볍다면 가볍고, 무겁다면 무거울 물음들을 음악학자 정경영에게 던졌습니다. 준비해 간 소박한 질문들이 부끄러울 만큼, 그에게서 듣게 된 대답은 대단히 광대한 것들이었어요. 많은 화두들이 오고 갔습니다. 어쩌면 음악학과 크게 관계없을 좋은 리더에서부터 인문학, 음악학, 비평, 생태학, 역사 쓰기, 소리 연구, 공공 음악학에 관한 것까지. 인터뷰를 마친 후 그와의 대화를 돌이켜 봅니다. 광활한 사유의 대지에 묵직하게 펼쳐진 이 독립적 이야기들은, 그러나 늘 한 가지로부터 태어났더군요. 그건 다름 아닌 윤리에 관한 인식이었어요. 타자와 어떻게 건강하게 마주할 것인가, 나와 타자가 어쩌면 서로 훼손되지 않고 함께할 수 있을까. 그의 모든 생각과 연구와 활동, 그러니까 그의 삶은 이 같은 물음 없이는 추동될 수 없는 듯 보입니다.

지난 씨샵레터 92호 VIEW에 발행된 [PART I] 음악학자 정경영 인터뷰의 두 번째 파트입니다. 혹 이 글과 먼저 만나셨다면, 이전 인터뷰를 읽고 오시기를 권합니다.


성숙한 이해와 좋은 연구 질문

정경영 보편적인 이야기는 내게 와닿지 않아서 허탈한 이야기가 될 수 있어요. 그렇지만 개별적인 이야기가 개별적인 것에서 시작했음에도, 그것의 특수성과 개별성을 잃지 않는 한에서 보편적인 이야기에 가 닿는다면, 뭔가 ‘개안’한 것 같은, 그런 경험이 될 수 있거든요. ‘아, 그렇구나. 이 음악을 통해서 나는 드디어 음악이 이야기하는 바의 그 끝자락을 좀 잡은 것 같아.’ 이런 느낌 같은 거예요.

그리고 음악이 시간적인 경험이다 보니까 결국 우리가 시간을 살아내는 것, 그러니까 우리의 삶과 자꾸 유비가 생긴단 말이에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음악회 해설을 하다 보면 그 음악이 지시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 같은 것들이… 뭐라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하여튼 그런 것들이 청중과 공유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될 때 그걸 탁 건드리게 되면, 그때는 청중과 되게 짜릿하게 공명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얘기인 거죠.

에디터S 그런 것이 연구하는 일에도 연결될 수 있을까요?

정경영 그게 한 끗 차인데요. ‘감동’이라는 말을 쓸 때는 음악학적 배경지식이 많지 않은 청중을 염두에 두는 것이고요, 그것이 학문적인 작업에서는 감동의 전제가 되는 ‘성숙한 이해’가 필요한 거죠. 연구를 통해서 성숙한 이해에 도달하고 싶다는 거예요. 음악 분석을 통해서, 혹은 역사적인 어떤 배경을 통해서, 혹은 그 관계들을 통해서 그런 것들을 알게 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런 것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이 사정을 알고 보니 복잡한 거더라’ 하는 것이 드러나는 과정인 거구요. 그런 게 저는 개인적으로 되게 감동적이에요. 게다가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구나’라는 걸 알면 알수록, ‘그래도 이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확실한 문제가 아니었구나’ 하는 것들도 알게 되구요. 이런 것을 알면 알수록 성숙한 이해에 가 닿는다고 생각합니다.

에디터S 말씀하신 그런 성숙한 이해에 가 닿는 연구의 출발점에는 좋은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좋은 질문은 무엇일까요?

정경영 너무 정확하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솔직한 질문이죠. 내가 이걸 정말 궁금해하는지가 중요하죠. ‘이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이 멋지다고 생각할까’가 아니라. 내가 정말 궁금해하는 질문인가의 문제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어요. 그건 정말 궁금하기 때문에 자다가도 궁금하고요, 정말로 자다가도 일어나서 그걸 확인하느라고 몇 시간씩 보낸 적이 허다합니다. 너무 궁금해서 내일 아침까지는 도저히 못 기다리겠으니 자다가도 일어나서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것도 뭐 올드한 얘기일 수 있어요. ‘내가 궁금한 것은 없어. 그렇지만 나는 공익을 위해 사람들이 물어볼 만한 걸 대신 물어보겠어’ 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걸 잘 한다면… 축하드립니다. 그렇지만 저는 못 합니다.

예를 들면, ‘생태학’이라는 말 있잖아요. 제가 ‘생태학’이 뭔지를, 연구소에서 한 5년간 물어봤어요. 계속 “생태학이 뭐예요?” 그렇게 묻고 다녔다고요. 물론 생태학이 무엇이다, 하고 대답할 수는 있겠죠. 그럼에도 계속 물어봤던 이유는, 생태학이라는 말이 저에게 궁금증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생태학이라는 말이 저를 하나도 자극하지 않았다고요. 그러면 전 생태학에 관해서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러니 제가 계속해서 생태학이 무어냐고 물었던 건, ‘나 좀 살려줘’ 하는 얘기였어요. 연구소에서 소리와 생태학이라는 주제로 연구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지금은 쓸 수 있습니다. 생태학이 이제 진짜 저를 두근대게 하기 시작했거든요.

음악학자와 생태학적 태도

에디터S 그 이야기를 더 들려주세요.

정경영 제가 늘 궁금해하던 다른 문제들과 같은 결에서 생태학을 만나게 된 순간이 있었어요. 언젠가부터 윤리학에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거든요. 윤리학은 말하자면 타자에 대한 관심이고, 다른 것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인데, 생태학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생태학이 던지는 문제는 ‘타자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 타자가 진짜 타자인가.’ 같은 것이고, 다만 이때의 타자가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거죠.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같이 살고 있는, 함께 세계를 점하고 있는 그런 것이라면, 그 타자와 어떻게 만나야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요, 그것이 윤리학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면 생태학은 저에게 전혀 낯선 문제가 아니게 되는 거예요. 윤리학에서 다루는 똑같은 질문을 생태학은 어떻게 풀어내고 있을까, 이런 것이 이제 너무 궁금해지는 거죠.

에디터S 그런 것이 음악학, 혹은 소리 연구와 만날 수 있나요?

정경영 그걸 찾고 싶어요. 그 접점이 어디 있는지. 찾지 못했을 뿐이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접근이 나이브해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알아요. 왜냐하면 생태학의 문제를 이렇게 타자의 문제로, 윤리학의 문제로 추상적으로 얘기해 버리니까요. 그러면 생태학이 아닌 게 없어진다고 염려하는 분도 있겠죠.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이야기하려면 역사학에 관해 말해야 해요.

역사학에서 가장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뭐냐하면, 역사적인 사료, 사건, 재료들이 제 상상력을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역사’가, 혹은 ‘연구’가 ‘소설’이 아닌 이유는, 역사적인 사건들, 역사적인 재료들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기 때문이에요.1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어요. “소설은 허구적 상상력을 발휘하려고 역사적 재료를 사용한다면 역사는 허구적 상상력을 제한하려고 역사적 재료를 사용한다.”

정경영, “음악사 연주하기: 음악사 서술의 해석학적 이해” 『서양음악학』 16권 3호 (2013) 50.

음악사 쓰기 행위를 ‘연주’와 다르지 않다는 주장이 무슨 말인지 궁금하면 위 논문을 읽어 보세요.
역사가는 역사적 사건들, 혹은 어떤 재료들 사이가 비어 있더라도 장인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 사이를 채워야 해요. 장인적 상상력이란 역사적인 재료들이 허용하는 한도가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 역사적 재료와 사건이 가진 속성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때 발휘될 수 있는 거고요. 말하자면, 그 장인적 상상력이 역사에 이미 새겨져 있는 사건들, 재료들에 의해 한정될 때 그것이 소설이 아닌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런 것이 역사 서술에 대한 제 신념인데요. 이제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생태학적으로 타자를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방식으로 역사에 접근해야 한다.’

이런 것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어요. 옛 건물을 복원하는 대목장의 인터뷰예요. 한 20년 전 신문에서 읽었어요. 기자가 이렇게 물어보죠. “어떻게 그 옛날 건물을 복원합니까?” 그랬더니 “그림도 있고요, 책도 있습니다.” 그러니 기자가 다시 물어보죠. “거기에 모든 것이 다 상세하게 다 적혀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그랬더니, 뭐 오래돼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대목장이 약간 화가 난 것 같아요. “나 대목장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책에 ‘기둥이 오동나무 지름 20cm’ 이렇게만 쓰여 있어도 나머지는 다 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흙을 뭘 써야 하는지, 서까래는 무슨 나무를 써야 하는지… 다른 많은 요소들이 오동나무 20cm짜리 기둥이라는 정보 하나로 다 저절로 결정된다는 거죠. 이건 목수 일하면서 30년 지나면 그냥 알게 되는 거라는 말일 거예요. 재료에 대해 빠삭하게 알게 되니까요.

역사학자들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1717년과 1719년에 중요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사이에 기록이 없다면요, 그 사건들, 그리고 그 관계들을 통해서 기록되지 않은 것도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 채워 넣어야 한다는 거예요. 물론 이때의 상상력은 아까 말한 것처럼 역사적 사건이나 역사적 관계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이어야 하고요. 역사학자도 그런 장인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 장인이 어떻게 되느냐, 재료가 나한테 하는 말을 경청하는 거죠. 그러니까, 생태학적 태도인 거고요.

음악사 연주하기

에디터S 음악사 서술에 관해서도 이야기 나누고 싶었는데, 벌써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어요.

정경영 시도해 보고 싶은 음악사 서술이 있어요. 지금까지의 음악사 서술은 대체로 이미 정해진 플롯을 따르죠. 예컨대 바로크 음악을 다룬다면, 오페라가 만들어졌고, 그다음에 오페라 세리아가 나오고, 그다음에 기악음악이 서서히 등장하고… 이런 식으로 이미 정해진 서사가 있고 거기에 맞는 작품들을 예시로서 배치하는 방식이죠. 서양에서 쓰인 것이든 우리나라에서 쓰인 것이든, 기본적인 음악사 서술은 이런 구조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요.

전 반대로 해보고 싶어요. 정해진 플롯 안에 음악적 예시를 배치하는 게 아니라, 그걸 거꾸로, 그러니까 음악을 살피면 그것이 드러내는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이야기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것은 문제가 많은 작품을 골라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 작품 하나를 깊이 들여다보는 방식이 음악사를 훨씬 풍성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작품은 정치적 맥락, 장르의 경계, 양식의 역사 등 여러 층위의 질문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니까요.

비유하자면, 이미 지도가 그려진 길을 따라가는 대신, 어두운 공간에서 촛불 하나 켜보는 거예요. 하나의 작품을 조명하면 그 주변이 밝아지겠죠. 또 다른 문제적 작품을 살피면 다른 영역이 또 환해질 거고요. 이렇게 작품들을 면밀히 살피는 과정에서 어떤 이야기와 역사적 맥락이 밝혀질 수 있어요. 비연속적인 서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지만.. 동시에 연속적이기도 한 서술이죠.

제게 늘 흥미로운 작품이 몬테베르디의 《탕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인데요. 이게 이런 접근의 좋은 예예요. 이 작품은 몬테베르디 마드리갈집 8권에 수록되어 있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마드리갈이라고 보긴 어렵거든요. 그렇다고 오페라라고 부르기도 애매하고요. 이 애매함 자체가 질문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장르의 역사도 살펴야 하고요, 몬테베르디가 이걸 왜 작곡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왜 마드리갈집에 실었는지, 그 음악에 포함된 라멘토 양식의 역사도 알아봐야 해요. 그러다 보면 이 작품의 주변이 환하게 밝혀진단 말이에요. 그러면 적어도 음악사에 폭력을 가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에디터S 이런 것을 역사 서술의 방법론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흥미로워요. 역사가 시간에 관한 것이라고 할 때 연속적인 것을 생각하기 마련이잖아요. 저도 좀 그런 것 같고요. 자동으로 생각이 그렇게 가는 것 같은데요. 그래서 새로운 접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소리 연구와 소리적 상상력

에디터S 음악연구소장으로 계시면서 소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2015년이죠. 벌써 10년도 더 되었네요. 지금이야 음악 분야만이 아니라 시각예술, 인문학 등 타 분야에서 소리에 대한 관심이 거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그 때 선생님이 다른 것도 아니고 소리 연구라고 하는 것을 시작한 배경이 궁금해요.

정경영 정확히 언제 소리연구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다만 서양의 ‘음악’ 개념이 너무 협소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에요. 이것을 어디로 넓힐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소리’로 갔던 맥락은 크게는 맞지만,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에디터S ‘음악의 개념이 너무 좁다’라고 했을 때 그 ‘좁다’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예컨대 존 케이지 같은 사람들에게서 음악의 개념이 이미 넓어지긴 했잖아요. ‘음악이라고 하는 것 자체의 개념이 새삼스레 여전히 좁구나’라고 생각한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정경영 ‘존 케이지나 다른 아방가르드 음악들이 기존의 음악적 용어로 설명되기 어렵겠다’라는 것도 자극이었어요. 더 크게는 ‘음악’이라는 용어에 대한 서구적 관점, 혹은 태도 같은 거였어요. 저한테는 서구의 음악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3화음 뭐 이런 게 아니라, 아무 일도 안 하고 음악을 바라보는, 음악을 듣고 있는 그 청중의 모습이거든요. 그 음악회장의 모습. 그걸 벗어나고 싶었던 거죠.

그러던 차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듣는 소리들은 어떻지, 뭐 이런 생각을 하게 됐구요. 그러다 ‘가만있어 보자.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소리들이 뭐지? 우리가 스쳐 지나가면서 듣는 소리들이 우리한테 영향을 크게 미치는 것 같은데, 그런 건 왜 음악 연구에서 하면 안 되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쫙 모아 보니까 ‘사이공간’(in-between space)의 소리로 생각해 보면 좋겠더라구요. 그러고 나서 이런 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없을까, 찾아보니 이미 되게 많았고요. 그 사람들은 그걸 ‘소리 연구’(sound studies)라고 부르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실망했냐? 아니죠. 되게 신났죠. 너무 흥분했어요. ‘와, 내가 혼자 생각하는 게 아니구나. 내가헛짓 하는 게 아니구나. 이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그러고서 문헌을 쭉 뒤졌는데, 이거 다 읽고 따라가는 데도 마음먹으면 5년이면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신생 학문이었어요. 소리 연구가 막 활성화된 것은 2000년대 후반이고, 2010년 이 정도부터가 본격적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해볼 만하겠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점점 빠져들어간 것 같아요. 스며들었죠.2음악학자가 어떻게 소리 연구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아래 논문도 재밌을 거예요.

정경영, “음악학에서 소리연구(Sound Studies)로” 『음악과 문화』 41호 (2019) 49-77.

에디터S 소리 연구를 ‘발견’하셨군요. 처음엔 일단 신났겠지만 그걸 10년 넘게 계속해서 하고 계신 건 그것이 가치 있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정경영 소리 연구의 가치, 간단합니다. 너무 쉽게 얘기할 수 있어요. 앞서 ‘음악학은 인간이 만든 음악이라는 무늬를 연구해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소리도 인간의 무늬라는 게 소리 연구의 전제예요. 소리 연구 전에도 소리를 연구하는 학문 있었어요. 물리학에서 음향학 같은 게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소리 연구가 다른 것은, 소리를 음향학 같은 물리적인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 현상으로 본다는 점이에요. 그런데한동안 ‘소리는 인간의 무늬가 아니야’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소리는 그냥 음악의 재료잖아. 음악과 언어의 재료일 뿐이잖아.’ 이렇게 생각하니까요. 그러니 ‘그 자체로서는 중립적일 뿐인 ‘소리’는 연구할 필요가 없는 거고, 그 재료에 불과하던 소리가 마침내 ‘음악’이 되면, 그제야 인간이 손을 댄 ‘무늬’가 되니까 연구해야지.’ 이렇게 말이죠.

그렇지만 소리 연구가 끊임없이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요. 소리가 날 때 그 소리는 이미 문맥 안에서 나는 것이고, 그 문맥 안에서 이미 의미를 획득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리를 연구한다는 것은, 그 소리의 의미를 만드는 ‘문맥’을 연구한다는 거구요, 그 문맥은 너무너무 인간이 만들어놓은 문맥인 거구요, 그러니 소리는 그저 중립적인 ‘재료’인 것이 아니라, 이미 음악을 연구하는 것과 똑같이 인간의 무늬를 연구하는 거라구요. 얼마나 흥미롭습니까.

게다가 음악은 굉장히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인 것 같은데, 사실 일상의 소리는 그렇지 않잖아요. 그런 소리들이 일상에 퍼져 있으니,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소리로 의미화되어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거죠.

에디터S 구체적으로 무엇을, 그리고 또 어떤 방식으로 연구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같이 공유해 볼만한 주제나 연구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정경영 지금 돌이켜 보면, 지금에서야 소리 연구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저는 제 마음이 두근대지 않으면 연구 못해요. 소리 연구는 제게 매력적이었지만, 소리 연구에서 이미 만들어진 성과물들이 저를 자극하게 하기까지는 오래 걸렸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아까 그 생태학 이야기에서처럼, 그런 절박한 물음으로 자리 잡는 데까지는 너무 오래 걸렸어요.

조너선 스턴(Jonathan Sterne)이 이렇게 얘기했어요. “우리(소리 연구)의 방법론은 소리적 상상력(sonic imagination)이다”라고요.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고, 지금도 잘 몰라요. 근데 이걸 얼마나 절박하게 몰랐냐면요, 이 ‘소닉 이매지네이션’을 연구소에서 표어(catch phrase)처럼 쓰면서 연구원들에게 매번 물었어요. ‘소닉 이매지네이션’이 대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달라고요. 뭐 쉽게 얘기하면 할 수 있겠죠. 생태학의 문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쉬운데, 그렇게 쉽게 얘기하면 그게 제게 절실한 문제가 전혀 되지 않으니까요.

또 한편에는, 그렇게 거창하게 묻지 않더라도, 소리 연구가 크게 관심 갖는 것 중에 하나가 청취의 문제거든요. 그게, 말하자면, 그냥 제가 궁금했던 점들을 자꾸 건드리기 시작했어요. 예컨대 전 귀가 너무 아파서 죽어도 이어폰 못 끼고 다니겠거든요. 그런데 제 아들은 외출할 때 이어폰 깜빡하면 다시 집으로 들어와서 가지고 나가더라구요. 마치 옷 안 입고 나간 것처럼. 대부분 학생들이 그런 것 같고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이 세상의 소리와 단절됐나’ 이런 걱정부터 시작해서 ‘그들은 대체 어떤 소리를 듣나’ 그런 것들이 그냥 궁금했던 거죠. 그러다 ‘이어폰을 옷처럼 입고 다니는 세대가 “음색 쩐다”는 표현 쓰는 게 우연은 아니겠구나’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됐죠.3‘쩌는 음색’에 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해 보세요. https://youtu.be/-2sZ5B6HUAM?si=wcyDwllxzAxrQHft

그러고 보니까 ‘청취의 방식’(technique of listening)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귀에 이어폰을 늘 꽂고 다니니, 소리가 그냥 머릿속에서 울리는 거 아니겠어요? 청취의 방식이 달라졌다는 건 이런 거겠죠. 이런 것의 극단에 있는 것이 ASMR이라고 생각해요. ASMR에서 소리는 내 몸 속에서 나는 것처럼 들리게 만들어지잖아요. 그러니까 이어폰을 옷처럼 입고 다니는 세대와 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청취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공공 음악학과 윤리적 태도

에디터S 이제 정말 마지막 키워드입니다. 공공 음악학. 최근 새로이 관심 가지기 시작한 분야가 공공 음악학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정경영 이것도 최근 관심은 아니고 굉장히 오래된 거예요. 근데 그걸 뭐라 부를 말이 없어서 그냥 ‘공공 음악학’이라고 한 건데, 제가 생각해 낸 줄 알았는데 ‘Public Musicology’라는 말이 이미 있었어요. 신기하게도 제 관심과 실천이 학계의 흐름과 거의 동시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제가 소리 연구를 시작한 게 2015년인데 그게 세계적으로 본격화된 게 2010년이고, 공공 음악학이란 말도 한 2년 전쯤부터 생각하고 있는데 올해 초 음악이론 학술지 『음악 이론 스펙트럼』(Music Theory Spectrum)에서 ‘Public Music Theory’ 특집호를 출판했으니까요.

제가 이걸 오래된 관심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공공 음악학적 실천을 너무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유학 마치고 한국에 귀국하자마자 시작한 게 예술의전당에서 일반인들 대상으로 하는 교양 음악 강좌였구요, 음악회 비평, 프로그램 노트 쓰기 이런 것들부터 해서, 아무리 겸손하게 얘기해도 해설은 몇백 회 이상 했어요. 대충 계산해도 500회쯤 될 것 같아요. 그밖에 방송 출연, 교양서 출판, 대중 강연 같은 것까지, 공공 음악학이라고 할 수 있는 걸 다 하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한다고 알려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예컨대 음악회 가서 해설하는데, 어떨 때는 약간 치욕스럽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해설해 달라고 불러놓고서는 없는 사람 취급해요. 그날 연주되는 곡목이 바뀌었는데 미리 알려주지도 않구요. 연주자들은 ‘저거 뭐야’ 이렇게 쳐다보는 것 같은 그런 굴욕적인 순간도 있어요. 심지어 어떨 때는 ‘사회자님, OOO 이런 멘트 꼭 넣어주세요.’ 같은, 사전에 약속되지 않는 걸 부탁하기도 해요. 음악회 해설이 마치 즉흥적으로 무대에서 떠드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단 말이에요. 해설가가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낀 순간들이 반복됐어요.

그런 것들이 굉장히 어려울 때쯤 제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어떤 걸 요구해야 하는지 정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어요. 결론은 간단해요. ‘나는 사회자가 아니라 음악을 해설하는 사람이다.’ ‘음악회 안에서 해설가는 일종의 연주자다.’ 연주자가 그렇듯 내가 준비한 것만 하겠다는 것이고, 나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감동을 주겠다는 것이기도 하고, 이 준비를 연주자가 무대를 준비하듯 똑같이 하니까(정말로 악보 보면서 수십 번씩 음악을 들어요) 연주자 대하듯 나를 존중하라는 거였고, 그렇게 실천해 왔어요.

그러다가 꽤 오래전에 음악회 해설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강의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그 김에 한번 쭉 정리해 봤어요. 해설자가 되는 데 필요한 준비, 태도, 윤리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니 유용한 점들이 있었어요. 다만 동시에, 이게 나의 성향일 뿐 모든 관객이나 상황에 다 맞는 정답은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됐죠.

이런 고민을 거치면서 공공 음악학은 단순히 지식을 쉽게 전달하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점차 깨닫게 됐어요. 그건 무엇을 말할 것인지,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같은 것에 대한 문제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 그렇게 생각해 보니까 공공 음악학은 공공 지식의 문제, 공공성의 문제, 음악학의 문제, 음악학을 전달하는 문제, 심지어는 윤리의 문제에까지 닿는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포괄하는 어떤 연구를 해 보고 싶다는 게 요즘의 생각이에요.

에디터S 그럼 방법론적 연구가 되는 건가요?

정경영 하나 마나 한 연구가 되겠죠. (웃음) 하나 마나 한 연구지만, 제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그 중요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설명해 주는 연구, 나아가 제가 수행하는 공공 음악학적 실천에는 어떤 윤리적 경계가 존재하는지, 무엇은 해도 되고 무엇은 해서는 안 되는지, 그리고 왜 그런 기준이 필요한지를 사유하게 만드는 연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다시 ‘윤리’

에디터S 오늘 대화에서 여러 가지 키워드들이 나왔지만, ‘윤리’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쓰신 것 같아요. 지금 맥락에서는 음악학자가 전문가로서 가져야 할 윤리의식에 관한 것이겠죠.

정경영 그러고 보니까 오늘 대화의 처음도 윤리에 관한 문제였어요. 왜 음악학을 공부하게 됐냐 물어보셨잖아요. 저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부채 의식이 중요한 계기였다고 답했고요. 그것도 말하자면 윤리에 관한 얘기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건용 선생님이 제 스승인데요. 그 선생님이 그렇게 ‘음악의 윤리’라는 책을 쓰고 싶어 하셨어요. 그땐 제가 몰랐어요. 왜 ‘음악의 윤리’ 얘기를 쓰고 싶어 하시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은 거죠.

에디터S 그때의 이건용 선생님의 나이가 되셨나요?

정경영 지금의 저보다 훨씬 젊으셨죠. 저는 이건용 선생님께 정말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선생님은 사회적인 문제에 음악가로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러면서도 음악이 가지고 있는 음악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셨고요. 이강숙 선생님도 마찬가지구요. 두 분 모두 은사님이신데, 그분들이 제게 사회적인 부채 의식 같은 것들을 더 부채질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분들이 어느 날 갑자기 학술지를 만드셨는데요. 그 학술지 이름이 『낭만음악』이라는 거예요, 낭만음악… 제가 생각하기에는 『음악과 현실』이라든가, 『음악과 사회』라든가, 아니면 『음악과 윤리』라든가 이래야 할 것 같은데 낭만음악이라는 거예요. 거의 싸울 뻔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고마워요. 그러니까, 음악이 사회와 관련이 있지만,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만일 ‘music alone’ 같은 게 있다면, 음악이 가지고 있는 그 자율적인 순수한 매력, 그것을 달리 표현하기 어려우니까 ‘낭만’이라고 한 게 아닐까 싶어요.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치열하게 사회 얘기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 자체의 매력을 잃지 않으려는 것. 그게 이건용 선생님의 놀라운 생각인 것 같아요. 스스로는 아마 그걸 변증법적이라고 생각하실 거고요.

에디터S 감동적이에요. ‘음악가로서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하면서 동시에 ‘음악다움을 잃지 않아야 한다’라는 거. 멋진 말인 것 같아요. 그런데 어렵기도 해요. 그게 대체 뭐지? 음악가로서의 사회적 책임이 있다면 그게 뭘까, 그러면서도 음악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게 무슨 말일까.

정경영 대답할 수 있어요. 이건용 선생님이 ‘제3세대 작곡가 운동’이라는 걸 이끌었던 주역인데요, 그때 말하자면 선언문 같은 걸 쓰셨어요. 그건 일종의 ‘크레도’(Credo)였어요. 그러니까, ‘I belive, 나는 믿거니와’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하거든요.

‘나는 믿거니와, 음악의 논리와 삶의 논리가 충돌하면 삶의 논리가 우선한다고 믿는다’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선언문인데, 그게 너무 좋았어요. 왜냐하면 그때 사회적인 상황이 ‘젠장, 음악’ 이러고 있을 땐데, ‘음악보다, 일단 살아야 음악이 있는 거 아냐’ 이런 얘기니까 동의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당시 2세대라고 생각되는 작곡가 분들은 유럽의 선진적인 테크닉을 배운 음악으로 청중과 괴리되는 음악을 쓰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이건용 선생님의 《만수산 드렁칡》이란 작품을 들었는데, 국악 관현악단과 소리꾼, 양악 합창을 위한 음악이었고 너무 좋았어요. 현대적이면서도 전통적이고, 황지우 시를 가사로 메기고 받고… 그러다 굉장히 현대적인 화성으로 합창이 나오기도 하고. 길을 찾았구나, 그렇게 생각할 때쯤 그다음 제3세대 음악회가 열렸어요. 청바지 입은 남자, 여자가 나와서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는데, 그건 그냥 가요였어요, 가요. 완전 삐졌죠. 음악의 세련된 내적 논리와 대중성을 조화롭게 줄타기하다가 한쪽을 훅 버린 거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그 당시 조교였던 주성혜 선배한테 얘기했더니 눈을 반짝거리면서 선생님들과 자리 마련해 주겠다고 했어요. 이강숙 선생님, 이건용 선생님, 81학번 주성혜 선배랑 우광혁 선배 이렇게 만났어요.

에디터S 87학번이시잖아요. 엄청 선배님들 아니에요?

정경영 엄청 선배죠. 그때 제가 대학교 2학년 땐데, 2학년짜리 하나 삐졌다고 선생님 둘, 당시 대학원생이던 81학번 선배 둘 이렇게 온 거예요. 그때 이건용 선생님이 소고기를 구워주셨는데 저 때문에 사준다고 그렇게 얘기하시더니, 술이 몇 잔 돌아간 다음에 다 조용히 하라고 하시고는 제게 얘기해 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삐졌다는 말, 왜 음악을 포기하시냐는 질문을, 공손하게, 드렸죠.

그랬더니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달리기를 하면 땀 흘리려고 달리기 하는 사람 있나. 달리기를 하면 뒤에 떨어지는 게 땀이지. 나는 그 순간순간 내가 필요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달려가는 거고, 그 뒤에 땀이 흐를 텐데, 그 땀이 어떤 궤적을 이루는가 하는 건 자네가 나중에 얘기해 주지.’

그러니까, 어떨 때는 사회적인 문제로, 어떨 때는 낭만으로… 그러니 그걸 변증법적이라고 얘기하는 거고요, 그렇게 생각과 삶이 일치하기 때문에 너무 훌륭한 사람인 것 같아요. 멋있어요. 멋있는 분이에요.

에디터S 선생님도 그런 분이신 것 같아요. 왜 음악학을 하게 됐는가, 좋은 질문이란 무엇인가, 역사 서술이 왜 생태학적이어야 하는가, 공공 음악학이 왜 중요한가 하는 일련의 질문들에 대한 답이 언제나 선생님의 삶과 음악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였으니까요. 지금 들려주신 이건용 선생님의 이야기에서 선생님이 크게 감동 받았다는 부분들도 같은 맥락인 것 같아요. 선생님이 이미 그런 분이니 스승의 그런 모습에 감동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신가요?

정경영 음악학은 너무너무 매력적인 학문이에요. 계속 똑같은 얘기지만, 음악학은 음악 인문학으로서 결국 인간을 이해하려는 학문이에요. 그렇지만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른 학문들과는 좀 달라요.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하거나, 인간이 사회를 이루면 어떻게 되는지를 말하는 방식은 비교적 직접적이죠.

그렇지만 음악이라는 것은 매우 추상적이에요.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과 한참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무늬’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고 하니까요. 바로 그 점 때문에 음악학은 어려워요. 쉽지 않아요. 하지만 동시에 그 추상성 덕분에, 인간을 단순한 생물이나 동물로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임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특별한 조건을 사유하게 만들어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것들, 다른 방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인간다움의 핵심을, 아주 추상적인 수준에서 엿볼 수 있는 학문인 거죠.

그래서 어렵기도 하지만, 이 공부가 평생 끝나지 않을 게 확실하잖아요. 얼마나 다행이에요, 평생 할 일이 있으니. 은퇴하고도,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해서 엿보게 되는, 인간의 아주 조그마한 그 틈새를 통해서 알게 되는 기쁨이 정말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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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T I] 음악학자 정경영 인터뷰 – 젠장, 이 음악 해도 되는 건가

94호_VIEW 202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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