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의 철학』을 읽던 중 어느 날의 일화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지인과 함께 카페에 머무르는데 좋아하는 밴드의 곡이 흘러나왔어요. “제가 좋아하는 밴드에요.” 함께 있던 지인에게 말했죠. 그는 보컬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물었고, 저는 ‘확실히 모르겠다’고 답했습니다. 보컬의 이름과 외모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가 스스로의 젠더를 어떻게 표현하는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보컬이 전통적으로 ‘남성스럽다’ 혹은 ‘여성스럽다’고 인식되는 음색을 지니고 있었다면 애초에 그는 성별을 묻지 않았을 거예요. 혹시 물었더라도, 제가 그 물음에 대해 무심코 남녀로 이분된 성별 중 한 쪽을 택해 답했을지도 모르고요. 이렇듯 우리는 성장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성별을 둘로 나누는 시스템에 익숙해집니다. 제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으레 그렇다고 이야기되는 것들’을 의심하는 공부를 해 왔음에도 이미 몸에 밴 습관을 걷어내기는 쉽지 않더군요.
『듣기의 철학: 우리는 무엇을 듣고, 듣지 않는가』(곰출판, 2025)는 이처럼 당연하게 ‘들어’ 온 것들을 다른 관점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책입니다. ‘우리(중 들을 수 있는 일부)가 소리를 어떻게 듣고 받아들이는가’는, 역사, 사회, 문화적 맥락 안에서 듣는 자의 정체성이나 주변 환경 등 다양한 요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또 변화한다는 것을 알려주죠.
젠더화된 소리와 소리주체들
성별(sex)과 젠더(gender)에 관해서는 이미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흔히 성별은 생물학적인 성, 젠더는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성으로 이해되곤 하지만, 이 역시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듣기의 철학』에도 몇 번 언급되는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는 최근의 저작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문학동네, 2025)에서 정치 선전에 이용되는 ‘반젠더 이데올로기’를 정리하고 반박합니다. 극우 세력과 트랜스 배제적 페미니스트들은 성별이 ‘변하지 않는 생물학적 실제’라고 주장하며 지정된 성별과 다른 언어로 젠더를 표현하는 이들을 타겟으로 삼는데요. 이에 저자는 ‘막 태어난 인간의 특정 신체 부위에 근거해 성별을 지정하는 행위에서부터 이미 권력이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를 묻죠.1주디스 버틀러.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 윤조원 역. (서울: 문학동네), 287-289.
이 내용을 염두에 두고, 음악학자 김경화의 글 ‘소리가 들려주는 젠더’를 읽어봅시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우리는 그것이 남성의 목소리인지 여성의 목소리인지 어떻게 단정할 수 있을까요? 성별이 정말로 신체의 차이에 의한 것이라면, 몸이 없는 기계 음성들은 어째서 남성 혹은 여성으로 상상되는 것일까요? 저자는 시리, 알렉사 등 인공지능 음성의 기본 설정이 ‘여성의 것’이 되는 현상을 분석하는데요, 여기서 ‘여성의 것’이라는 범주는 절대적이지도, 당연하지도 않습니다. 저자는 기계 음성이 대략 100~150Hz(남성)와 200~250Hz(여성) 범주로 이원화되었음을 짚는 톰슨의 연구를 가져옵니다. 젠더를 둘로 나눠 고정하는 행위, 그 이분된 젠더에 따라 음성을 두 가지 주파수로 나누는 행위가 상호작용하며 ‘소리가 젠더화 된다’고 설명하죠.
이런 일이 기계 목소리가 출현하면서 갑자기 나타난 경향은 아닙니다. 이 글은 또한 인간을 성별과 인종으로 구분하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해 차별적인 담론을 만드는 일이 음악학 안에서도 있어 왔음을 지적합니다. 저자는 1970년대 하버드 음악사전의 ‘종지 개념’과 헬름홀츠의 음향학에서 기준이 되는 ‘사인 웨이브’(sine wave)를 예시로 들죠. 특정 주파수의 음성이 ‘여성의 것’인 동시에, 약하고 비이성적이라는 해석이 덧붙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성의 목소리에 대한 관념 안에서도 촘촘한 구분이 생겨납니다. 저자는 신화 속 세이렌의 ‘듣기 좋은, 여성적인 소리’는 남성을 이끌어 위험으로 몰아넣는 유혹의 수단이 되고, 고르곤의 ‘듣기 싫은, 여성적인 소리’는 어떤 범위를 초과하는 주파수이므로 그 자체로 위험을 드러내는 ‘괴물의’ 소리가 되었음을 짚습니다.
넬리와 리나, 영화 속 타자화된 여성의 목소리
이 글을 읽으며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두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먼저 데미언 셔젤 감독의 <바빌론>(2022)입니다. 무성 영화 스타 넬리는 유성 영화가 출현하면서 위기를 맞습니다. 넬리가 데뷔할 무렵엔 그의 목소리를 문제 삼는 이가 없습니다. 무성영화 시대였으니까요. 하지만 촬영 현장이 스튜디오로 옮겨지고 내부 음향 장비를 쓰게 되자, 그의 발성과 말투는 ‘녹음하기 까다롭고 거슬리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유행하는 영화와 캐릭터 유형이 변한다는 점도 한몫하고요. 게다가 미디어의 발달로 대중이 스타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며, 넬리의 자유분방한 일상은 음성이나 말투, 외모와 결합되어 구체적으로 지탄받습니다. 복잡한 역학이 있는 거죠.
이 같은 전개는 고전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1952)의 리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매우 다른 두 영화, 두 인물이지만 비교해 볼 지점이 있습니다. 역시 영화사의 과도기, 높고 비음이 많이 섞여 ‘듣기 싫다’고 여겨지는 리나의 음성은 코러스 배우 캐시의 아름다운 보컬로 더빙되죠. 영화는 캐시와 리나의 심성과 목소리를 함께 대조합니다. 리나의 음성은 미성숙하고 신경질적인 여성의 것으로 희화화되며 코미디 요소로 쓰이고요. 물론 <사랑은 비를 타고>는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사랑받는 고전을 새삼스럽게 비판하려는 건 아니고요, 여성의 ‘듣기 좋은 목소리’와 ‘듣기 싫은 목소리’가 나뉘고 캐릭터의 성격과 결합되는 프레임에 관해 말하는 것입니다.
넬리의 목소리와 행동은 여성답지 못한 것, 리나의 목소리와 행동은 지나치게 여성다운 혹은 ‘여성 특유의 단점’을 지닌 것으로 취급됩니다. 다만 넬리에 대한 선입견은 영화 속 세상의 것이지 영화의 관점은 아닙니다. 전형성 안에서 리나를 그려 나갔던 <사랑은 비를 타고>와 달리, 70년가량 이후 만들어진 <바빌론>은 넬리를 복합적인 인물로 존중하죠. 캐릭터를 표현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도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시간이 흐르며 달라진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소리가 젠더화되는 현상에 드리워진 정치성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소리는 순수하고 독립적인 물리 현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앞선 두 영화의 사례에서 여성 인물의 음성은 시대 맥락 안에서 외모나 행동과 결합되고 주변 상황과 더불어 인식된다는 것을 살펴본 것처럼요. 이제 소리 주체의 젠더에 관한 논의에서 범위를 넓혀, 주체를 둘러싼 소리와 ‘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 보겠습니다.
주체를 둘러싼 소리, ‘주체’의 재해석
소리는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한 주체가 소리를 내보내고 다른 주체는 그것을 수용하는 식의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소리의 파동이 공간에 울려 퍼지면, 다른 것들과 섞이고, 서로에게 닿습니다. 내가 일으킨 소리도, 남이 생성한 소리도 서로 서로 간섭하죠. 지하철을 기다리던 중 내 옆에 있던 두 사람이 말다툼을 시작한다면, 그들의 날 선 대화는 안내방송, 발소리, 열차 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 이어폰으로 듣던 음악 등과 뒤엉켜 들릴 것입니다. 어쩌면 대화의 내용과 발화자의 특징을 살펴 구성된 편견이나 혐오를 발견할 수도 있겠죠. 이 소리의 덩어리를 그 순간의 ‘소리풍경’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보이는 풍경(landscape)에 대응되는 개념인 소리풍경(soundscape)에 관해서는 음악인류학자 권현석의 글 ‘소리풍경으로의 여행’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소리풍경에 대한 과학기술철학자 이상욱의 관점은 흥미롭습니다. 그의 글 ‘포스트휴먼 시대의 소리 환경’은 인간을 둘러싼 소리풍경은 이미 기술적(technological)이라는 관점을 제시합니다. 첨단기술만이 아니라 철도처럼 일상화된 것들도 기술이며, 기후 위기 시대에는 공기처럼 ‘순수한 자연환경’이라 인식되는 것마저 기술의 영향을 받는다는 거죠. 따라서 저자는 비인간 행위자들을 소리 주체로 주목하는 ‘포스트휴머니즘적’ 관점을 불러옵니다.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다양한 행위자들이 다층적으로 관계하고 있어서 ‘인간 사이 네트워크만으로 포착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인류세를 넘어 쑬루세로, 트러블과 함께하기
여기서 저는 과학자이자 역사가, 문화비평가인 도나 해러웨이(Donna Jeanne Haraway, 1944~ )의 ‘사이보그 선언’을 떠올립니다. 1985년 발표된 이 선언은 인간과 동물, 유기체와 기계, 물질과 비물질 사이 경계가 불분명해졌다는 분석에서 출발해 순수한 인간됨도, 여성됨도 없음을 짚습니다. 해러웨이는 절대적이고 전체적인 과학(Science)이 아닌 구체적인 현상들에서 시작하는 과학들(sciences)을 지향하고 변화하는 정체성‘들’을 긍정합니다.
최근의 작업들을 통해 그는 인간(hu-man)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사고를 더 발전시킵니다. 이상욱의 글 ‘포스트휴먼 시대의 소리 환경’에는 ‘인류세’2인류세(Anthropocene): 인류가 지구 생태계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켜 지질학적으로 새로운 시대 구분이 필요해졌음을 강조하는 개념. 이상욱, “포스트휴먼 시대의 소리 환경,” 『듣기의 철학』, 235.에 관한 언급이 잠깐 나오는데요, 2016년 저작 『트러블과 함께하기』(마농지, 2021)에서 해러웨이는 인류세를 ‘심각한 불연속성의 시대’라고 이야기하며 이를 대체할 서사 틀로 ‘쑬루세(Chthulucene)’를 제안합니다. 음악학자 김경화의 글 ‘소리가 들려주는 젠더’에서 고르곤은 여성성이 악마화된 예시로 등장한 바 있었습니다. 해러웨이는 고르곤을 ‘여성으로 상상되곤 하지만 특정한 젠더가 없는, 얼굴이 계속해서 변형되는 수평적이고 촉수적인 손길을 지니는 쑬루세의 행위자’로 재의미화합니다. 쑬루세는 ‘인간-종말의 위기로 직진하는’ 사고가 아니라 ‘위태로운 시대에서 트러블과 함께하는, 개체중심적이지 않은, 고르곤처럼 촉수적이고 수평적인 사유를 지향하는’ 서사의 틀입니다.3한 거미의 학명 ‘피모아 크툴루’(Pimoa cthulhu) 그리고 ‘땅과 바다의/땅과 바다 속의/땅과 바다 밑의’라는 뜻의 그리스어 ‘chthonios’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H.P. 러브크래프트의 괴물 ‘크툴루’(Cthulhu)와 구분하기 위해 해러웨이가 철자를 바꾸었습니다. ‘단독 개체로서의 괴물이나 신성이 아닌 다양하고 오만한 땅속의 분할 가능한 것들과 힘들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해요.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최유미 역. (서울: 마농지, 2021), 93-103, 171-179, 233.
해러웨이는 인간과 환경을 분리해 일컫고 그 상호작용에 주목하는 대신, 인간이 처음부터 환경, 현상, 타 종들과 얽혀 존재한다는 관점을 제안합니다. 이 전환에는 때로 번역이 필요합니다.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한 대목에서 해러웨이는 솜 반 두렌의 『항로』를 인용하며 멸종이 단일한 점과 같은 사건이 아닌, “섬유조직을 풀어버리는 길게 지속되는 느린 죽음”이고 인간은 그 ‘풀리는 직물의 일부’4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70~71.라고 말하는데요, 이 죽음들을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한 작품을 지난 여름에 발견했습니다. 전설적인 뮤지션, 작가, 운동가인 패티 스미스와 소리 예술 플랫폼 ‘사운드위크 컬렉티브’의 협업 전시 ‘끝나지 않을 대화’는 기후 위기 시대를 소리로 읽습니다. 이중 <대멸종 1946~2024>은 전시장의 거대한 스크린에 1946년부터 2024년까지 멸종한 생물들의 상을 띄웁니다. 패티 스미스의 음성은 그 이름들 하나하나를 읊습니다. ‘침묵의 소리’, 현재진행형이며 엮인 멸종‘들’을 번역한 기록이라고 할 만합니다.
어떤 ‘과학적 지식’들은 특정한 의도에서 출발해 생산, 재생산되며 굳어진 담론의 영향을 받은 결과물일지도 모릅니다. 남성/여성의 이분법, 성별/젠더의 이분법, 인간/환경의 이분법. 세상을 둘로 구분해 해석하는 담론은 삶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일정한 사고방식 안에 우리를 가두어버리기도 합니다. 영역들을 나누어 그 사이 연결고리를 끊고 우선순위를 가르는 일, 거기 끼워 맞춰지지 않는 존재와 현상들을 이상한 것이나 없는 것으로 규정하는 일은 자주 일어나죠.
‘으레 그렇다고 이야기되는 것들’을 의심하고 사유의 틀을 뒤집는 훈련에 관심이 많은 독자로서, 『듣기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읽는 경험은 꽤나 흥미로웠습니다. 소리를 다양한 학문과 예술 작품, 집단적/개인적 경험들의 맥락에서 탐구하는 소리연구는 교차성과 가변성을 핵심으로 하는 분야인 것 같습니다. 『듣기의 철학』도 그런 성질을 품고 있고요. 스스로 결론을 내기보단 다른 것들과 엮어 사유하기를 요청하는 책입니다.『듣기의 철학』에서 출발한 이 글에 이런 저런 사례와 이론을 덧붙이게 된 것처럼요. 한 해쯤 지나고 다시 이 책을 펼치면, 또다른 사례와 이론들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죠.
참고 문헌
- 정경영 외. 『듣기의 철학: 우리는 무엇을 듣고, 듣지 않는가』. 서울: 곰출판, 2025.
- 주디스 버틀러.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Gender?) 윤조원 역. 서울: 문학동네, 2025.
- 도나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Manifestly Haraway). 황희선 역. 서울: 책세상, 2019.
-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최유미 역. 파주: 마농지, 2021.
글 | 김연우
아닌 것들을 골라내고 남은 것을 씁니다.
‘씨샵레터 X 곰출판’이 진행한 서평 필진 공모를 통해 선발된 당선자의 글입니다.
『듣기의 철학: 우리는 무엇을 듣고, 듣지 않는가』

“세상은 읽는 것이 아니라 들어야 하는 것이다.”
_자크 아탈리
눈을 감고 귀를 열면 들리는 것들
청취를 통해 사회를 감각하는 청각적 사유의 확장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로서의 ‘소리’에 주목하다
‘소리연구’에서는 모든 소리의 의미가 사회・문화적 맥락 안에서 ‘구성된다’고 믿는다. 음악이나 언어 같이 특수한 소리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가 사회ㆍ문화의 맥락 안에서 “발생하고 소통되며 수용된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다루는 ‘소리’는 단순한 청각 자극이 아닌,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새로운 감각으로 정의된다. (…중략) _곰출판

90호_VIEW 2025.10.16.
『듣기의 철학: 우리는 무엇을 듣고, 듣지 않는가』 서평 특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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